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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은 사랑 아닌 학대다 - 한규희 H+ 양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2021년 07월 29일(목) 01:00
한규희 에이치플러스(H+) 양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최근 모 연예인에 대한 가십을 비롯해 데이트 폭력 등과 연관돼 자주 접하는 단어, ‘가스라이팅’은 타인의 현실 감각이나 상황 등을 교묘하게 조작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지난 201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성인의 데이트 폭력 가해 요인’ 연구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가해 유형 중에서도 ‘누군가와 있는지 항상 확인했다’ ‘통화가 될 때까지 계속 전화’ ‘옷차림 제한’ 등의 통제 행동이 71.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러한 통제 행동은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자식·친구 등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조용하게 일어나며,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조차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거나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지속적인 자기 의심, 자존감 하락 등의 심리적 불안 상태로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결국 가해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고 빠져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도움과 함께 정신과적 상담 및 치료가 필요하다.

가스라이팅은 정신병명이 아닌 심리학적 용어로 1944년 조지 쿠거 감독의 영화 ‘가스등’(gas light)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남편이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속임수와 거짓말을 통해 아내를 정신 착란으로 몰고 가는 내용에서 유래했다. 영화의 제목 ‘가스등’은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정신적 학대를 상징한다.

이러한 욕구가 생기는 원인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타인을 조종해 실체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우와 단지 심리적 이득을 얻기 위해 타인을 조종하고자 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소시오패스적 성향의 사람이 금전적 또는 물리적 이득을 얻고자 타인을 세뇌하는 경우라면 실체적 이득이 목적이다. 이는 영화 ‘가스등’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후자의 경우는 자기애성 인격인 사람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반복적으로 비난하면서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하는 경우다.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는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애적 욕구는 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착취적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자기애성 인격장애라 한다.

‘가스라이팅’은 부모·자녀, 상사·부하 등 불균형한 권력 상황에서 나타나기 쉬운데 부부나 연인·친구 관계에서도 서서히 불균형한 권력 상황이 구축되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가해자는 상대방을 비난하면서도 ‘나 정도 되니까 너를 받아준다’라며 피해자를 안심시키고, 길들이는 반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구도가 된다.

이때 가해자는 부족하고 못난 피해자를 자신이 받아 주었다는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하고 심지어 스스로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반복적인 비난으로 인해 자기 의심을 지속하고, 결국 가해자가 자신을 받아 주었다는 만족감으로 의존 욕구를 충족한다. ‘가스라이팅’이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며 피해자, 심지어 가해자도 가스라이팅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다.

평소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불안하고 우울감을 느낀다면 스스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는 가스라이팅 과정에서 자존감 상실, 심한 경우 인격의 황폐화까지도 경험하면서 괴로운 상황에서도 다시 가해자를 찾거나 또 다른 가스라이팅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정신과적 상담·치료 등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물론 자신이 가스라이팅의 피해자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대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가스라이팅‘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적절하고 바른 소리를 했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했는지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을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