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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소식, 북송 정치인·문인…당송 8대가
2020년 02월 18일(화) 00:00
<초당대총장>
소식(蘇軾, 1037~1101)의 자는 자첨이고 호는 동파거사다. 쓰촨성 미산현 출신으로 당송 8대가 중 한 명이다. 신법에 반대한 구법당의 일원으로 신종, 철종, 휘종때 활약한 북송의 정치인, 관료, 문인이다.

부친인 소순 또한 유명한 문인으로 소로천(蘇老泉)으로 불렸다. 동생 소철 또한 뛰어난 문재를 보여주었다. 형 소식과 함께 진사 시험에 합격해 중서사인과 한림학사를 지냈다. 소순, 소식, 소철 모두 당송 8대가에 포함된다.

소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한서, 후한서 등을 통독했다. 21세 진사시험에 합격했다. 논문의 제목은 형상충후지지론(刑賞忠厚之至論)으로 나라의 상벌은 반드시 충직함과 온후함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감독관인 구양수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평생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후일 문장이 천하에 홀로 뛰어날 것”이라고 소식의 빛나는 미래를 예견했다.

신종이 왕안석을 참지정사, 재상으로 발탁해 신법 개혁을 맡겼다. 그는 신법에 찬성하지 않았다. 촘촘한 법규로 백성의 삶과 생활방식을 속박하는 것에 반대했다. 1071년 신법의 부작용을 거론한 상소문을 바쳤다. 왕안석은 대노했다.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해 항주통관, 밀주지사를 역임했다. 비록 왕안석과 소식은 서로 다른 당파에 속했지만 시와 산문을 통해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였다. 왕안석은 소식의 눈에 관한 시에 감탄해 여섯 수의 시를 지었다. 왕안석이 시역법의 후폭풍으로 정계를 떠나 강녕으로 낙향했다. 신법당인 여혜경이 정국을 주도했다. 1079년 소식이 지은 시가 조정을 우롱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신법당 사이에서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왕안석은 “성세에 어찌 재사를 죽인다는 말인가”라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 신종이 그를 항주로 강등, 좌천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이 시기에 탄생한 걸작이다.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로 정하고 시작에 전념했다. 1083년 여주 단련부사로 전임했다. 금릉 종산에 은거한 왕안석을 만나 서로의 오해를 풀었다.

신종 사후 나어린 철종이 즉위하고 구법당이 재집권했다. 사마광이 재상으로 돌아왔으며 그도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사마광은 면역법, 청묘법을 폐지했다. 그는 면역법은 이미 정착되어 가는데 개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로 인해 구법당내에서 그의 위상이 미묘해졌다. 중앙 정치를 벗어나고자 항주자사로 내려갔다. 재임 중 서호의 진흙을 파내어 제방을 만들었다. 이것이 유명한 소제(蘇堤)다. 중앙에 소환되어 병부상서, 예부상서가 되었다. 동생 소철은 예부상서, 어사중승을 걸쳐 문하시랑 겸 상서좌복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지방 근무를 희망해 정주자사로 부임했다.

1093년 섭정을 하던 황태후 고씨가 죽고 철종이 친정에 나섰다. 신법당이 재차 집권했다. 정주자사에서 광동성 영주자사로 전근하던 중 모든 관직을 발탁당하고 혜주로 유배되었다. 59~62세까지 3년간 혜주에 있었다. 그가 즐겨 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62세 다시 해남도로 유배되었다. 미개한 연족이 주로 거주하는 오지였다. 그러나 그의 시혼은 소멸되지 않아 적잖은 시를 창작했다. 1100년 철종이 죽고 그의 동생인 휘종이 즉위했다. 섭정 황태후 상씨가 화합을 위해 구법당을 구제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도로 돌아가는 도중 강소의 상주에서 병을 얻어 1101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는 자유분방하고 거침이 없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백성의 애환을 자주 시의 주제로 삼았다. 주변의 친우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그의 시에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불교에 깊이 빠져 현실 삶의 허무함을 깊이 인식했다. 그의 시에 초월적이고 현실도피적 인생관이 깊게 스며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생을 관통하는 낙천적 품성으로 여러 번의 정치적 좌절과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갔다. “성격이 운명이다”라는 말이 그의 인생을 잘 묘사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