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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사마광, 북송 신종때 정치인…‘자치통감’ 저술
2020년 02월 11일(화) 00:00
<초당대총장>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는 군실이고 산시성 섬주 하현 출신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한 역사가이며 북송 신종, 철종 때의 정치인이다.

어릴때부터 신동으로 소아격옹도(小兒擊甕圖) 일화의 주인공이다. 어릴 때 한 친구가 물독에 빠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그는 침착하게 돌을 던져 물독에 구멍을 내어 물을 빼 친구를 구출했다. 이 이야기는 그림으로 그려져 교과서에 실렸다.

1038년 진사에 급제했다. 용도각직학사, 한림학사, 어사중승을 거쳐 상서좌복야 겸 문하시랑으로 승진했다. 한림학사로 있을 때 왕안석이 신종의 신임하에 신법 개혁에 착수했다. 보수적 성향의 사마광은 “조종(祖宗)의 법을 바꿀 수 없다”며 신법 시행에 반대했다. 한기, 문언박, 소식 등과 함께 신법에 반대하는 구법당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기존 관료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느껴 농민과 상인을 구제하는데 목적을 둔 신법을 수용할 수 없었다. 청묘법, 시역법 등에 반대입장을 피력했지만 수용되지 않자 중앙에서 퇴출되었다. 부도인 낙양에서 사실상의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토지겸병을 막고 농민과 빈민을 구제하려는 신법의 취지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구질서와 구체제의 옹호자라 할 수 있다.

낙양에 은거해 필생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의 집필에 전념했다. 유서, 유방, 범조우 등의 도움을 받아 1084년 전국시대에서 오대까지의 방대한 편년사를 완성했다. 주 위열왕 때부터 오대 세종 때까지 1362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전체 294권에 이르는 역사서다. 신종은 “지난 일을 거울 삼아 치도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자치통감이라는 책명을 하사했다. 공자가 지은 춘추의 체제를 본받아 명분을 바르게 하고 군신간의 대의를 분명히 해 정치의 나아가는 바를 밝히는데 목적을 두었다. 보수파의 거두답게 급진적 개혁의 위험성을 경고하려 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는 기전체로 서술되어 내용이 여기저기 중복되고 번잡스러웠다. 사마광은 이를 편년체로 서술해 쉽게 과거의 역사와 흥망을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치통감을 저술하게 된 이유로 “늘 역대의 역사책이 번잡하여 임금이 그 책들을 두루 읽을 수가 없음을 걱정하였다”고 밝혔다. 수많은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설처럼 생동감있게 서술한 것이 오랜 기간 최고의 사서로 자리매김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자치통감은 ‘제왕학의 교과서’, 영원한 ‘정치 교과서’로 높이 평가된다. 청나라 말의 양계초는 대표적 정치 교과서로 불렀다. 명나라 말의 왕부지도 “힘써 잘 다스려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자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책의 의미를 밝혔다. 조선 세종은 자치통감을 알기 쉽게 주석을 달도록 해 사대부들이 널리 읽도록 했다. 과거시험의 필수 과목이 되었다. 세종때 명신 최항은 “자치통감은 역사학 서적 가운데 용마루에 해당하는 책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책입니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은 평생 17번 자치통감을 읽었다. 자치통감은 마오의 전술, 전략, 철학의 토대가 된 주옥같은 역사서였다.

신종이 38세로 죽고 어린 철종이 제위에 올랐다. 조모인 선인태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구법당을 대거 기용했으며 사마광은 재상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그는 늘 “신법과 변방의 서하 문제를 없애지 못하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법의 전면 폐지를 선언했다. 이후 5번에 걸쳐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권 교체극이 벌어지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신법을 폐지한 사마광의 조치를 원우갱화(元祐更化)라 부른다. 휘종때 정권을 잡은 신법당의 채경은 구법당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그들의 이름을 석비에 새겨 원우간당비(元祐姦黨碑)라 명했다. 사마광 이하 120명이 명단에 포함되었다. 북송이 멸망한 것은 신법의 실시 때문이 아니라 신법의 폐지와 부활의 과정에서 사직이 멍들고 정치가 부패해진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