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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신종, 북송 6대 황제…대표적 개혁군주
2020년 01월 28일(화) 00:00
<초당대총장>
신종(神宗, 1048~1085)의 성명은 조욱으로 북송의 제6대 황제다. 왕안석을 기용해 국력 회복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북송의 대표적 개혁 군주였지만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5대 황제 영종의 장자로 모친은 선인태후 고씨다. 1066년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영종이 병사하자 19세에 즉위했다. 신종은 혈기왕성한 젊은 황제로 왕조의 장래를 깊이 근심하였다. 요나라, 서하에 대한 과도한 세폐 지급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현직뿐 아니라 전직, 퇴임 관료에 대한 후대로 국가재정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농업 생산이나 교역 활성화 등으로 늘어나는 세수가 급증하는 재정수요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1069년 부모의 복상을 마친 왕안석을 부재상인 참지정사로 기용하였다. 한강·한유 형제와 재상 증공량의 천거가 크게 작용했다. 왕안석을 불러 하문했다. “왕조가 100년간 큰 변고 없이 대체로 평온을 누린 이유가 무엇인가?” 왕안석의 답변은 100년간 태평했던 것은 오랑캐의 세력이 약한 덕을 보았고 사직이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본조백년무사차자(本朝百年無事箚子)를 올렸다. 나라를 바꾸는 대개혁이 시급하다는 요지였다. 신종은 제치삼사조례사(制置三司條例司)라는 기관을 만들어 개혁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신법이 본격 추진되었다.

청묘(靑苗)·모역(募役)·시역(市易)·보갑(保甲)·보마(保馬) 등 행정·재정·군사 개혁 조치가 연이어 발표되었다. 신법 시행으로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황족·귀족·관료 집단의 반대가 치열하였다. 신법은 영세 상인의 보호와 대상인, 대지주의 경제적 이익 독점을 타파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신법에 반대한 세력을 구법당이라 한다. 사마광, 소순, 소철, 문언박 등이 대표인사다. 신종 사후 북송시대 동안 신법당과 구법당은 다섯 차례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였다. 영세 상인을 구제하기 위한 시역법으로 대상인과 귀족·황족이 크게 타격을 받았고 이는 결국 왕안석의 퇴진으로 이어졌다. 신법당인 한강과 여혜경이 정책을 뒤이었지만 예전과 같은 패기는 사라졌다. 1076년 왕안석 퇴임 이후 신종이 직접 친정에 나섰지만 국정의 혼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법은 겸병을 억제하고 농촌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중농정책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상인들이 독점한 이익을 국가에 귀속시키려는 강병책의 의미도 적지 않았다. 북송의 멸망을 신법의 무리한 시행 탓으로 돌리는 시각이 적지 않다. 북송을 이은 남송의 정치를 구법당 출신이 주도한 것이 이런 해석에 일조했다. 개혁에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왕안석의 집권은 6년에 불과했다.

대외정책은 어려움이 많았다. 1071년 변경을 담당한 왕소가 재상 왕안석 지원에 힘입어 비교적 큰 토번 부족 20만명이 북송에 귀순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북송의 영토가 약 1200리 가량 늘어났다. 1073년 서하 이남에 사는 다수의 토번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진종때 체결된 전연의 맹 이후 처음으로 거둔 대규모 군사적 성취였다. 모역법, 보갑법, 보마법 등의 조치로 군사 부문에서 개혁의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베트남 정벌은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요나라와의 국경 분쟁에서도 산서성 하동의 경계지를 양보해 손해를 보았다. 재상 부필은 상주문을 올려 황제의 친정에 반대했다. “놀라서 심장과 간이 떨어질 지경”이라는 표현을 썼다. 대내적으로는 신법을 둘러싼 국론 분열로 어려움에 봉착했고 대외적으로는 국력 확장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고 1081년 서하를 공략하고자 60만 대군을 동원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원풍 8년(1085) 3월 초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조후가 8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철종이다. 조모인 선인태후가 수렴청정에 나섰다. 구법당이 다시 권세를 잡았고 신법당은 몰락했다. 낙양에 은거했던 연로한 사마광이 재상에 복귀해 신법의 전면 폐지를 선언했다. 조정은 정파간의 감정싸움으로 변질되었다. 20년 사용할 물자를 확보했음에도 부패한 정치가 북송을 패망의 길로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