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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문언박, 북송 인·영·신·철종대 명신
2019년 12월 31일(화) 00:00
<초당대총장>
문언박(文彦博,1006~1097)의 자는 관부(寬夫)로 산서성 개휴 출신이다. 북송 인종, 영종, 신종, 철종 때의 명신이다.

인종 천성5년(1027) 진사에 급제해 전중시어사, 전운부사, 추밀부사, 참지정사 등을 역임했다. 패주 왕칙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재상직에 올랐다. 1051년 탄핵으로 물러났다가 1055년 다시 재상에 복귀했고 로국공에 봉해졌다. 신종이 즉위해 왕안석이 신법을 추진하자 “국체를 해치고 백성의 원망을 산다”며 반대했다. 철종 즉위후 평장군국중사를 제수받았다. 1097년 태자소보에 제수되었지만 병사했다. 휘종은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로공집 40권을 남겼다.

소년시절 사소에게 경학을 배웠는데 사소의 모친이 그를 보고 ‘귀인이다’라고 평해 후대했다고 한다. 1027년 진사에 급제해 관직에 나왔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송과 서하의 전쟁이 일어났다. 하동전운부사로 부임해 산서성 인주의 보급로를 복원해 서하의 이원호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이원호가 열흘간 인주를 포위했지만 방어 태세가 완벽한 것을 알고 군대를 철수했다. 1047년 패주 왕칙이 봉기했는데 추밀직학사 명호가 진압하는데 실패했다. 그가 선문사로 임명되어 성아래에 땅굴을 파 성안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써 왕칙을 체포했다. 이 공으로 재상에 올랐다.

재상이 되자 추밀사 방적과 더불어 8만명의 병력을 삭감하고자 하였다. 병력이 줄면 해직된 군인들이 모반을 일으킬 것을 걱정하는 의견이 많았는데 인종은 그의 주청을 가납하였다. 그러나 우려했던 병사들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1056년 인종이 갑자기 발병하자 조정이 불안에 떨었다. 그는 침착하게 상황을 관리해 인종의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 조정을 안정시켰다. 건강이 좋지 않은 인종에게 태자를 세울 것을 주청해 윤허를 받았다. 인종이 죽고 태자가 영종으로 즉위했다. 입궁한 문언박에게 말하기를 “짐이 태자가 된 것은 그대의 공이다.” 그는 답하기를 “폐하께서 황제가 되신 것은 인종 황제의 뜻이며 또한 황태후가 도와주신 공입니다. 신은 아무런 공이 없습니다.”

영종이 그를 재상의 위에 두려 하자 이는 조정의 예법을 혼란케하는 일이라며 사양하였다. 신종이 즉위해 왕안석이 신법을 시행하였다. 그는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된 시역법의 폐단을 지적하며 사직하였다.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이 재상이 되었다. 그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원로인 문언박을 다시 중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평장군국중사로 임명되어 6일마다 한번씩 입궁하고 1달에 두 번씩 황궁에서 경학을 강의하였다. 그의 사후 휘종때의 권신인 채경은 문언박, 여공저, 사마광 등을 원우당인(元祐黨人)으로 칭하고 그들의 저작의 배포를 금하였다. 휘종은 그의 공을 높이사 당적에서 제외하고 충렬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가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연회를 열고 밤늦도록 주연을 베풀었다. 병사들이 화가나 마굿간을 부수고 그 나무를 불쏘시개 감으로 썼다. 기세가 너무 험악해 장교가 이러한 정황을 보고했다. 연회의 손님들이 공포에 떨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날씨가 참 춥다. 마굿간이라도 부수어 불쏘시개 감을 찾을만 하겠다”라고 말하며 개의치 않고 술을 계속 마셨다. 그러자 병사들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재상이 되어 입궁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폐하께서 관리들이 과도하게 승진운동을 하고 있다. 이를 억제하지 않으면 풍속이 어지러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손하고 겸허한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안석, 한유, 장괴를 추천해 모두 요직에 기용되었다.

어사 당개가 재상 문언박이 권력을 전횡하고 자신의 당파를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인종이 노하여 어사대로 보내 문책 받도록 하였다. 문언박은 황제에게 청하며 말하기를 “어사가 정무의 득실과 관리의 행동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당연한 직무이니 그에게 죄를 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당개는 좌천되었고 문언박도 재상에서 물러났다. 문언박이 재차 재상에 기용되자 맨 먼저 당개를 추천해 중앙의 요직에 발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