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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구양수, 북송 학자·정치가…당송 8대가
2019년 12월 24일(화) 04:50
<초당대총장>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자는 영숙(永叔)으로 강서성 여릉 출신이다. 북송의 학자 겸 정치가로 당송 8대가의 한명이다.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4세때 부친을 잃었다. 가난해 문구를 살 돈이 없어 모친이 모래 위에 갈대로 글씨를 써서 훈육했다. 유명한 화적교자(畵荻敎子)의 일화다. 1030년 진사과에 합격했다. 1036년 범중엄을 변호하다 재상 여이간에게 밉보여 이릉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약 10년간의 지방관 생활을 거친 후 중앙에 간관으로 복귀했다. 범중엄, 부필 등과 함께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했다가 안휘성 자사로 좌천되었다. 재차 중앙으로 돌아와 권지예부공거, 개봉 부윤을 역임했다. 한림학사겸사관수찬과 추밀부사를 거쳐 부재상인 참지정사에 오른다.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자 1071년 정계를 은퇴했다. 1072년 안휘성 영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종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당송 8대가의 일인으로 뛰어난 문인이었다. 송나라의 미문인 서곤체를 개혁하였다. 북송의 고문(古文)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당나라의 한유의 예를 따라 현란한 문체를 피하고 실질적이고 강건한 문체를 숭상했다. 증공, 왕안석, 소순, 소식, 소철 등을 발탁했다. 품행이 단정한 선비였지만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유머도 풍부했다. 가무와 여색을 즐겼다. 말년에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로 칭했다. 집고록 1000권, 장서 1만권, 가야금 하나, 장기 하나, 술 한 주전자 그리고 늙은이 하나를 합치면 여섯 종류의 일이 된다는 의미다.

산문으로는 취옹정기(醉翁亭記)가 유명하다. 중국 최고의 기행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취한 노인의 진정한 뜻은 술에 있지 않노라(醉翁之意不在酒)”라는 구절은 대표적 명구다. 글쓰기에 관해서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량(多量) 즉 많이 읽고 쓰고 고치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왕안석과 소식을 특별히 아꼈다. 소식은 1056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당시 시험관이 구양수였다. 둘은 고문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평생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관계였다. 구양수가 신법을 반대하자 왕안석은 선배를 맹렬히 공격했다. 개인적 관계보다 국가지사, 사직이 더 소중하다는 왕안석의 소신이 낳은 행동이다.

역사학파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역사학파는 올바른 역사를 통해 정치도덕을 혁신하고 화이(華夷)를 구분해 중화(中華) 원칙을 밝힌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신오대사와 신당서를 편찬했다.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 ‘구양수체’를 개발하였다.

초년시절 그는 화려한 사륙변려체 문장에 뛰어났다. 한림학사 서언이 그의 글을 보고 칭찬해 말하기를 “그대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날릴 것이다.” 그를 자신의 문하생으로 삼아 공부시켜 진사과에 합격시켰다. 서언은 그를 자신의 둘째 딸과 혼인시켰다.

인종 지화 연간(1054~56) 반대파들이 거짓 상주문을 만들어 지방관으로 파직시켰다. 이후 많은 시람들이 그의 무죄를 역설하므로 인종이 한림학사로 발탁했다. 지방으로 좌천된지 12년만의 일이다. 인종은 주변에 천하를 경영할 인물이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부필, 한기, 구양수가 그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구양수가 권지공고가 되었는데 당시 진사과 시험에서는 글을 쓸 때 기괴함을 숭상했다. 이를 못마땅이 여겨 과거 응시자의 답안지를 채점할 때 과거의 제자백가(諸子百家) 형식과 부합한 답안지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조정에서 원성과 비방이 이어졌으나 이후 고문체를 쓰는 것이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구양수는 “내가 도를 공부한지 30년, 얻은 것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원망과 미움을 지니지 않는 것이었다.”라고 고백했다. 범중엄을 변호하다가 재상 여이간의 미움을 받아 멀리 삼협으로 좌천되어 수년간을 지방관으로 근무했다. 여이간이 재상직을 물러선 후에야 중앙의 요직에 기용되었다. 그가 여주자사로 재직시 여단의 아들 여공저가 통관으로 있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근실하였으나 과묵하였던 까닭에 남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후 중앙으로 복귀한 후 여공저를 강력히 추천해 요직에 기용될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