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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한기, 북송 신종 상서령 추증 받은 명재상
2019년 12월 17일(화) 04:50
<초당대총장>
한기(韓琦, 1008~1075)의 자는 치규(稚圭)이며 하남성 안양 출신이다. 북송 인종, 영종, 신종 때의 명재상이다.

천주부 지주를 지낸 한국화와 비녀(婢女) 연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부모를 여의어 형의 보살핌을 받았다. 1027년 진사에 2등으로 급제해 장작감승, 통판치주를 역임하였다. 1034년 개봉부추관 1036년 우사간에 임명되었다. 간관으로 3년간 재직하면서 70여 개의 소(疏)를 올렸다. 1038년 상주한 상소에서 유민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중신 왕수, 진요좌, 한익, 석중림을 80년의 태평성대를 무너뜨리는 무능한 신하라고 비판하였다. 1039년 사천에 가뭄이 심해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자 안무사로 임명되었다. 세금을 감면하고 탐욕하고 포악한 관리를 숙청하였으며 불요불급한 노역을 폐지하였다. 식량을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죽(粥) 보급소를 곳곳에 설치해 190만여 명의 백성을 구제했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서하(西夏)의 이원호가 섬서성 변경을 공격해 안보 불안이 가중되었다. 1041년 이원호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영하 고원의 회원성을 공격했다. 한기는 대장 임복에게 1만8천명을 주어 적의 배후를 우회해 공격하되 험한 지역에 매복해 퇴로를 차단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작은 승리에 우쭐해 명령을 무시하고 영하 육덕 서쪽의 호수천(好水川)까지 추격했다가 적의 반격으로 참패했다. 송군이 영하 고원의 정천채에서 대패하는 등 서부 변경이 계속 위태로웠다. 한기와 범중엄은 함께 감숙성 경천에 주둔해 굳건히 지켰다. “군중에 한씨가 있는데 서하에서 그 이름을 들으면 뼈가 서늘해지고, 군중에 범씨가 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놀라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범중엄, 부필 등과 함께 경력신정(慶曆新政)에 참여했다. 1047년 7월 논비어칠사주(論備御七事奏) 글을 올려 시급히 추진해야 할 국사를 논했다. 부정부패를 차단하고 국정을 쇄신하는 내용의 구폐팔사(救弊八事)도 건의하였다. 그러나 보수 세력의 반발에 밀려 1년여 만에 실패로 끝났다.

1058년 재상에 올랐다. 취임 후 인종의 후사 문제가 최대 현안이었다. 한기는 “황태자는 천하의 안위가 걸려 있는 일입니다”며 황제를 설득해 사촌형 안의왕 조윤의 아들 조서를 황태자로 옹립하니 영종이다. 영종은 재위 3년만에 중병에 걸렸는데 후사 문제가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조욱을 황태자로 정했다. 1066년 영종 사후 즉위해 신종이 되었다. 1069년 참지정사 왕안석이 신법을 단행했다. 농민에게 저리로 융자해주는 청묘법을 반포하니 반대 상소를 올렸다. 1075년 상주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종은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은 삼천냥 비단 삼천 필을 하사했다. 상서령에 추증되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우사간으로 재직시 인종에게 재해가 빈번히 발생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수용되지 못했다. 또 다시 상소를 올려 “두연, 범중엄, 송교 같은 인물들은 사람들이 모두 바르고 충직하다고 합니다. 이들을 중용해야 합니다.” 상주문이 계속 수용되지 않자 지방관으로 전출을 요청하였다. 이에 인종이 상소문을 중서성에 내려 보내 논의토록 하명하였다.

소인(小人)도 이해하려 하였으며 선악과 흑백을 칼로 자르듯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소인들도 그를 배척하지 않았다. 반면에 부필, 범중엄, 구양수 등은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기 때문에 붕당의 표적이 되었다. 이로 인해 범중엄 등이 쫓겨났을 때 그만이 홀로 안전할 수 있었다. 범중엄 일파가 후일 다시 복권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기 덕분이었다. 누군가가 사마광과 여공저의 인물평을 요청하자 “재주가 편벽되고 그릇도 작다”고 답했다.

구양수와 증공량은 성격이 상극으로 매번 정무를 논의할 때마다 격렬히 싸웠다. 그럴때마다 한기는 말하지 않고 기세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려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니 둘다 그의 의견을 따랐다. 구양수는 그를 “사직을 지키는 신하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