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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부필, 북송 인·영·신종대 명재상
2019년 12월 10일(화) 04:50
<초당대총장>
부필(富弼, 1004~1083)의 자는 언국(彦國)으로 낙양 출신이다. 북송 인종, 영종, 신종 때의 명재상이다. 일찍이 범중엄이 그를 보고 “제왕을 보좌할 인재다”라고 칭찬했다.

인종 8년(1030) 무재(茂才)로 천거되어 장락감승, 직집현원, 지간원 등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경력 2년(1042) 지제고가 되어 거란에 사신으로 가 세폐를 늘리는 조건으로 토지 할양을 수용치 않았다. 요나라가 국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였다. 재상 여이간이 그를 사신으로 추천하자 입조하여 “군주는 신하의 치욕을 염려해야 하고, 신하는 감히 목숨을 아끼거나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기꺼이 사신으로 갔다. 범중엄과 함께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했으나 보수세력의 반발로 1년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1044년 요나라가 출병해 서하와 함께 태인족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인종은 요와 서하가 모의해 일을 꾸민 것으로 의심하였다. 황제께서 의심하면 그들의 계략에 말려드는 꼴이 된다고 송군의 출병을 반대하였다. 하삭(河朔)에 홍수가 발생해 많은 백성이 어려움에 빠졌다. 정부의 양식을 지원하고 십여만 채의 거처를 마련해 유민들을 각 지역에 수용하였다. 다음해 가을 추수때가 되자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갔는데 모두 50여만명이나 되었다. 또한 청주에서 군의 전력을 강화해 “청주의 병사는 강하다”는 말을 들었다. 왕칙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주의 금병(禁兵)이 이에 호응하려 하였다. 은밀히 제주를 공격해 반란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했다. 1058년 재상이 되어 불편부당하게 정사를 처리했다. “백관이 자신의 소임을 다해 천하가 무사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1061년 모친상을 당해 재상직에서 물러났으나 1063년 영종이 즉위하자 재차 재상에 발탁되었다. 1067년 신종이 즉위하자 무령군절도사를 제수하고 정국공에 봉하였다. 신종이 그에게 치국의 도를 묻자 답하기를 “군주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선악을 구분한 후에 상과 벌을 내려야 공과 신이 제대로 서게 됩니다.”

재상인 안수가 범중엄에게 딸의 혼처를 알아봐 달라하자 범중엄이 말하기를 “따님을 만일 관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하신다면 나는 달리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나라에서 최고의 선비를 구하신다면 부필만 한 이가 없습니다.” 안수는 부필을 한번 보고는 크게 마음에 들어 즉시 혼사를 결정했다.

서하와 전쟁이 벌어지자 상서(上書)가 많이 들어왔다. 처음 조정은 상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필은 “지제고 두명을 선발해 관리 및 백성들의 상서를 검토해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면 시행토록 하십시오”라고 간하였다. 또한 재상이 추밀원을 같이 지휘하도록 청했다. 이에 인종이 말하기를 “군사와 국정은 모두 마땅히 중서성에서 처리하여야 한다.” 이로써 재상이 추밀사를 겸하게 되었다.

왕안석이 참지정사가 되어 신법을 시행했다. 그는 신법을 싫어해 병을 핑계로 물러나기를 청했다. 신종이 그를 만나 묻기를 “누가 경을 대신해 재상으로 삼을만 하오?” 문언박을 추천하자 신종이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왕안석이 어떻소?” 부필 또한 답을 하지 않았다. 희녕 2년(1069) 8월 재상직에서 물러나 무령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청묘법(靑苗法)이 시행되자 말하기를 “이 법이 시행되면 재정은 확보될지 모르나 민심이 떠날 것이다. 돈을 빌리기 원하는 자는 모두 빈민일 것이다. 대여 후 회수가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청묘법은 유지될 수 없다.” 제거상평창 조제가 부필이 신법의 시행을 가로막는다고 고발했다. 좌복사판여주로 옮기라는 명을 받자 청하기를 “신법은 신이 잘 알지 못하므로 지방장관이 되기에 부적합합니다.” 물러나 낙양에 귀향해 병을 요양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1083년 낙양에서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주(遺奏)를 작성해 조정에 올렸다. 신종이 상주문을 보고 애통해 하며 3일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태위로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종을 뒤이은 철종은 신종의 사당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