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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범종 소설가]광주 4월 혁명은 젊은이의 긍지
2019년 04월 22일(월) 00:00
정권이 국민을 내버리면, 국민이 정권을 내버린다. 이것으로 이 땅의 제1 공화국과 4월 혁명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제1 공화국은 어떻게 국민을 내버렸는가? 하나의 예를 들겠다. 1954년에 헌법 개정안 국회 상정 때 정권은 사사오입(四捨五入)이란 걸 내세웠다.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 아닌 135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0.333명을 버리면서 한 명도 채 안 되는 걸 버렸으니 별것 아니라고 떠들었다. 과연 그런가? 1954년 당시 남한의 인구가 대략 2000만이었으니까 헌법 개정안 투표에 참석한 국회의원 203명은 각각 국민 9만 8522명을 대표하며 이 경우 국회의원 0.333…명은 국민 3만 2837명에 해당한다. 당시 정권은 독재자의 정권 연장에 쓰일 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국민 3만 2837명을 내버린 것이다. 이렇게 국민을 내버린 정권은 당연히 국민에게 버림받아야 한다. 그게 말했다시피 4월 혁명이다.

국민이 직접 나선 4월 혁명에 있어서 광주는 제 역할을 다했다. 1960년 4월 19일 오전에 학교 정문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온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에 의해서 광주의 4월 혁명은 시작됐다. 이날 광주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다. 저녁에 이르러 학생과 시민은 광주경찰서로 몰려가고 이때 경찰은 시민에게 발포한다. 이후 시위는 독재자의 퇴진 때까지 계속된다.

4월 혁명의 일익을 광주가 담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만 우리는 광주만의 특징을 찾고 싶어진다. 혹시 그런 게 있지 않을까?

나는 지난 세기의 90년대에 ‘호남 4·19 30년사(湖南 四一九 三十年史)’의 편집장으로서 책을 집필했는데 당시 광주만의 지닌 4월 혁명의 특징을 찾아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이것이다.

‘광주의 4월 혁명은 고등학생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혁명이다.’ 광주의 4월 혁명 첫 번째 특징은 그 주도 세력이 고등학생이라는 점이다. 이 고등학생의 주도는 다른 지역과 차별성을 보인다. 물론 다른 지역도 고등학생이 대거 참여했으나 광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광주의 4월 혁명이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자발성이다.

대구 2·28 학생 의거의 경우 외부로부터 자극이 있었다. 관료들은 학생들이 야당의 유세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일요일 등교라는 꼼수까지 부렸고 여기에 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했던 것이다. 마산 3·15 의거의 경우 민주당의 선거 무효 시위가 있었고 여기에 학생들이 시민의 일부로 참여했다. 정치권에 의해 시작되고 시민이 주도한 시위에 학생들이 동참한 것이다. 광주는 1960년 4월 19일 당시 직접 가해지는 압력이나 지역 정치권의 유도가 없었다. 고등학생들이 나서야 한다고 스스로 판단해서 스스로 나섰다. 광주 4월 혁명은 그 동력을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런 광주의 4월 혁명이 남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치에서의 민주주의 발전인가? 억압받은 자들의 인권 신장인가? 아니면 남북통일을 좀 더 강하게 염원하게 된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나는 당시 참여자들을 다수 만났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긍지’였다. 광주 4월 혁명에 참여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웠다는 긍지를 지니게 됐다. 이런 긍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 있어서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그들은 앞장섰다.

그들은 민주 투쟁에서 자신의 긍지에 걸맞게 행동했을 뿐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다. 이런 익명의 광주 시민이 좁게는 광주, 넓게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키워 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광주의 요즘 젊은이들도 긍지를 지니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세월호 때는 노란 리본을 달았고 촛불 집회 때는 촛불을 켰다. 노란 리본은 아픔을 껴안았고 촛불은 어둠을 몰아냈다. 광주의 젊은이들은 자신들만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4월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광주의 4월 혁명은 젊은이의 긍지이다. 1960년 4월에도 그랬고 2019년 4월에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