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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 세상만사] 돼지는 왜 죽어서도 웃는 낯일까
2019년 02월 08일(금) 00:00
엊그제 떡국을 먹었으니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옛날엔 떡국 국물을 만들 때 부유한 집에선 꿩고기, 없는 집에선 닭고기를 많이 썼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설날은 음력으로 새해 첫날이다. 이날 아침 아이들은 설빔을 곱게 차려입고 집안 어른 및 친지들에게 세배를 한다. 설빔은 새해를 맞이하여 설날에 입는 새 옷인데, 노랑과 분홍 등 색동에는 어린이들의 앞날이 밝게 트이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눈이 오면 개들이 꼬리를 흔들고 좋아하듯이 설이 되면 제일 좋아하는 이는 어린아이들이다. 설날은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설레는 날이다. 고까옷(때때옷) 입고 세뱃돈도 받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 수 없다. 이날이 오면 평소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도 어쩐지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만 같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되는 윤극영의 동요 ‘설날’ 4절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무서웠던 아버지 순해지시고/ 우리 우리 내 동생 울지 않아요.”



새로운 한 해가 또 시작되고



한데 까치들의 설날은 왜 어저께일까?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기록이 보인다. 신라 21대 비처왕(혹은 소지왕) 때 선혜(善兮) 왕비가 묘심(妙心) 스님과 내통하여 왕을 살해하려 하였다. 하지만 왕은 까치(까마귀)와 쥐, 돼지와 용의 도움으로 이를 모면하였다. 문제는 쥐·돼지·용의 경우 모두 12지에 드는 동물이라 기념할 날이 있었지만 까치만 그런 날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설 바로 전날을 까치설날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 오히려 까치설은 ‘작은설’이라는 설(說)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주 옛날에는 작은설(섣달 그믐날)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다. ‘아치’는 순우리말로 ‘작다’(小) ‘작은’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아치설에서 ‘아치’의 뜻이 상실되면서 음이 비슷한 ‘까치설’로 엉뚱하게 바뀐 것이다.

어찌 됐든 이제 까치설도 우리들의 설도 다 지나고, 또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지난해 개의 해에 이어 올해는 돼지의 해다. 사람들은 개와 돼지를 한 묶음으로 엮어 누군가에게 욕을 할 때 ‘개돼지 같다’라고 한다.(사전에도 ‘개돼지’는 ‘미련하고 못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해서 한 단어로 올라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을 보면 개돼지만도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엊그제는 여비서를 성폭행했던 전직 도지사가 드디어 쇠고랑을 찼다. 수많은 후배 여성들을 울렸던 어느 유명 연극인도 법정 구속됐다. 일찍이 최영미(58) 시인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돼지에 빗댄 바 있다. 2005년에 발표한 ‘돼지들에게’란 제목의 시를 통해 문단 내에 만연한 성범죄에 대해 경고를 보낸 것이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도 속은 온통 욕망으로 뭉쳐진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 그들에 비하면 오로지 종족 보전을 위해 본능에 충실할 뿐인데도 가만히 앉아서 욕을 먹는 돼지들은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니! ‘돼지 발톱에 봉숭아물’이라니! 이런 모욕이 또 어디 있나. 하여 나는 부당한 대우에 침묵으로 맞서는 저 개돼지들의 억울함부터 우선 풀어 주고 싶다. 시인 최영재(72)의 ‘개 같은 인간’이라는 동시를 들려주면 저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으려나.

“어휴, 개 같은 인간.” / 길 가던 사람의 혼잣말을 듣고/ 강아지가 어미에게 물었지요./ -엄마, 저 말이 칭찬인가요?/ “아무렴, 개 같은 인간이라면 좋은 사람이지.”/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았어요./ “표정과 말이 다르니 인간이지.”/ -그리고 비웃었어요./ “인간은 원래 비웃음, 쓴웃음, 헛웃음… 웃음도 복잡한 동물이야.”/ -말투가 어쩐지 욕 같았어요./ “개는 주인을 무조건 좋아하지. 개는 남을 속일 줄 몰라. 개는 괜히 남을 미워하거나 발톱만치도 속이려 들지 않아. 그러니 개 같은 인간이라면 아주 괜찮은 사람 아니겠니?”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공감이 가는 참으로 멋진 시다. 인간의 나쁜 속성을 이리도 정확하게 꼬집어 놓았으니, 이만하면 개돼지들도 충분히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너희들한테 늘 미안하다. 너희 돼지들은 우리를 위해 삼겹살에 목살에 심지어 껍데기까지 모든 걸 다 주었는데, 우리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너희들 욕이나 하고 있었으니 정말 미안하다. 그래도 올해는 돼지의 해라 해서 오랜만에 너희들에 대한 칭송이 자자(藉藉)하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인가. “돼지는 탐욕의 상징이라지만 자신의 적정량을 섭취하면 더 이상 먹지 않는 강한 절제력을 가지고 있다. 미련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나 고양이보다 더 영리하다.”



받는 것보단 주는 게 더 행복



돼지가 개보다 영리하다는 말을 들으니 이런 유머가 떠오른다. 지금은 시인이 됐지만 오래전 도지사를 지냈던 분으로부터 박장대소하며 들었던 얘기다. 어느 날 암퇘지가 암내를 내서, 주인아주머니가 아랫마을 수퇘지와 교미를 시키기 위해 리어카에 태웠다. 안 타려고 떼를 쓰는 암퇘지를 억지로 태워 겨우 접을 붙이고 돌아왔다. 한데 새끼를 배게 하기 위해서는 한 번으로는 안 된다. 그래 다음 날 다시 교미를 시키려는데 돼지우리에 암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참을 찾은 후에야 겨우 발견했는데. 아뿔싸, 그 암퇘지가 리어카에 미리 타고 얌전히 앉아 있더라는 얘기. 이때부터 ‘얌전한 꿀꿀이 리어카에 먼저 올라탄다’는 속담이 생겼다는데. 믿거나 말거나, 다만 돼지의 총명함만은 충분히 알 수 있을 테다.

돼지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가축인 육축(六畜: 소, 말, 돼지, 염소, 개, 닭)에 들어간다. 예전엔 ‘돝’이라 불렀으며 ‘돼지’라는 명칭도 ‘돝아지’(도야지)가 변해서 된 것이다. 한자(漢字)에서 집을 뜻하는 ‘가’(家) 자를 보면 돼지가 우리와 얼마나 친밀한 동물인지 알 수 있다. 갓머리에 돼지 ‘시’(豕). 옛날에 도적과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의 아래층에 돼지우리를 설치하고 위층에는 살림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금 돼지의 해라 해서 특별히 ‘빈 외양간에 황소 들어오듯’ 뜻밖의 재물이 생길 리 없건만 우리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황금 타령’을 해 대는 데 여념이 없다. 한데 왜 돼지는 제사상에 올라서도 온화하게 웃는 낯인가. 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 본다. 마지막 자신의 ‘몸뚱아리’까지 모든 걸 아낌없이 내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어렸을 땐 몰랐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다 보니 이제는 알겠더라. 사랑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