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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의 세상만사] ‘나는 이렇게 속았다’
2018년 11월 30일(금) 00:00
최근 광주시 산하 어느 기관장은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이는 ○○기자 클럽의 아무개 기자라 했다. 그는 대뜸 무슨 책을 사 달라고 했다. 말투가 아주 강압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관장은 금방 눈치를 채고 점잖게 나무랐다. 전화 속의 남자는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놨다. 언론사 난립 속에 ‘게나 고동이나’ 기자랍시고 나대는 세상이긴 하다. 한데 좁쌀만도 못한 권력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자들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니 놀랍다. 게다가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이들도 더러 있다니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주 어렸을 때(아마도 중학교 1학년 때쯤?) 읽었던, ‘나는 이렇게 속았다’라는 책이 생각난다. 그 책에는 이 세상의 온갖 사기 수법이 총망라돼 있었다. 꽤 두툼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전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종 사기 사건을 죄다 모아 놓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조숙했던 데다 한창 사춘기에 읽어서인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내용은 성(性)에 관련된 것들뿐이다. 남아 선호 사상이 잔존해 있던 당시, 아들을 낳게 해 주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어느 용한 점쟁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전직 시장 그를 위한 변명

점쟁이는 간절한 소망을 안고 찾아오는 아낙네들에게 어이없게도 ‘계란 요법’이라는 것을 사용했다. 여인의 알몸에 계란을 굴려가며 마사지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웃옷만 살짝 올려 보라는 요구에도 주저주저하던 여인들은 아들을 낳고자 하는 절실함 때문에 점쟁이의 온갖 교언(巧言)에 넘어가 결국 치마까지도 벗는다. 점쟁이는 어느 정도 계란 마시지를 하다가, 때가 됐다 싶으면 여인의 몸을 덮친다.

그 사기꾼 점쟁이가 아들을 잘 낳게 해 준다 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데는 바로 이런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기 사건이자 명백한 성폭행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여인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아들 하나 갖고자 하는 욕망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엊그제 전직 광주 시장이 재직 시절 문자에 낚여 수억 원의 피해를 봤다는 소식이 온통 시중의 화제가 됐다. 피해자는 윤장현(69) 전 광주시장이다. 한때 민주당 선거운동원 등으로 활동했다는 사기범 김 모(여·49) 씨는 지난해 12월 이 지역 유력 인사 10여 명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권양숙입니다. 다름 아니라 딸 비즈니스 문제로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5억 원이 급히 필요하니 빌려 주시면 곧 갚겠습니다.” 사기꾼들의 사기 수법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할 때 ‘급하다’고 하면서 그 수령 기한을 최대한 짧게 잡는 것이다. 마치 홈쇼핑 방송에서 ‘매진 임박’이나 ‘기회는 오늘 하루뿐’이라고 하면서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과도 흡사하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한 지난 10월 초까지도 윤 시장은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기꾼을 권 여사로 철석같이 믿고 송금 후에도 수개월 동안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피해액은 무려 4억5000만 원. 윤 시장은 의사 출신인 데다 4년의 시장 재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생활이 넉넉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도대체 이 돈은 어디에서 구한 것일까. 경찰 조사 결과 3억5000만 원은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은행 두 곳에서 대출받았으며 나머지 1억 원은 지인에게 빌렸다고 한다.

윤 시장은 어쩌다 이런 어이없는 사기 사건에 그처럼 쉽게 넘어간 것일까. 여러 추측들이 많지만 나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그의 품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동안 부인도 모르게 수천만 원씩을 빌려서까지 필요한 곳에 쾌척한 뒤 나중에 벌어서 갚곤 했던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니까. 이번에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던 그로서는 권 여사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데 그냥 못 본 체 지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사기를 당했던 시점을 볼 때 공천을 받기 위한 정치자금 아니었나 의심하기도 한다. 당시 윤 시장은 재선(再選) 출마를 놓고 경쟁하던 터였다. 따라서 친노·친문 등 민주당 핵심 그룹에 영향력을 가졌을 법한 권 여사에게 공천 청탁을 하기 위해 돈을 보낸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일단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검은 돈’이었다면 사과 박스 같은 것도 있는데 어찌 내놓고 본인 명의 계좌에서 통장으로 송금했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통장 송금은 언젠가 계좌 추적만 해도 다 드러날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금 전달 수단으로 더없이 좋은 사과 박스(가로 50㎝, 세로 25㎝, 높이 24㎝) 한 상자면 5만 원권으로 6억 원까지도 채울 수 있다는데 말이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랴

순천 출신인 사기범 김 씨는 휴대전화 판매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윤 시장의 선거 캠프에도 들락거렸다고 한다. 경찰은 “김 씨가 사기 전력은 있으나 보이스피싱은 생초보였다”고 말한다. 대포폰 대신 자신의 휴대전화를 그대로 사용했고, 가족의 통장을 버젓이 범행에 사용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실명으로 된 통장 계좌번호를 알려 준 배경에는, 상대방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철저히 믿게끔 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그저 어리숙한 범행이 아니라 상대방의 심리까지 이용한 고도의 사기 수법이지 않았을까.

경제가 어려워지면 사기 사건이 늘어난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범죄도 날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엄밀히 말하자면 보이스피싱(voice phishing)이 아니라 문자를 이용한 ‘레터피싱’(letter phishing)이라 하겠지만, 갈수록 보이스피싱으로 멀쩡한 사람이 망가지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어느 통계에 의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20~30대 젊은 층의 피해가 전체의 24%로 노년층 19.8%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남녀노소 모두들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재직 기간 동안 상품권 한 장 받지 않을 정도로 청렴했다는 ‘시민 시장’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는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며, ‘우리 모두 조심하자’는 뻔한 결론으로 글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세상에 믿을 놈 아무도 없다’는 걸 왜 몰랐을꼬. 결코 양서(良書)라고는 할 수 없는 ‘나는 이렇게 속았다’라는 책 한 권만 읽었어도 그런 꼴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