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연일 동장군이 기세를 부렸고 많은 눈이 내렸다. 눈 쌓인 골짜기마다 순백의 꽃이 피어났다. 메말랐던 가지에도 눈꽃은 피어나 봉우리를 이룬다. 눈꽃은 다투거나 질시하지 않고 제각기 아름다움을 발하는데, 흐드러지거나 화려하지 않는 자태는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동장군이 맹위를 떨칠수록 눈꽃은 더욱 탐스럽게 열린다. 마른 가지에 꽃눈을 달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눈송이는 절정의 순간에 개화(開花)를 한다. 혹한의 추위가 엄습해올 때, 비로소 꽃망울은 터지고 세상은 하얗게 물든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꽃을 피우는 임계의 순간이 있나보다. 저 송이송이 눈꽃이 일러주는 것은 시간의 섭리와 기다림의 미학이 아닐지.

이곳은 장성 축령산. 지나온 길들이 눈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산 너머 너머의 길들도 모두 눈에 덮였다. 산과 길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로 연결돼 눈에 묻혀 있다. 치유의 숲 축령산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들을 품는다. 산이 품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어서, 세상의 모든 쓸쓸함과 수다한 상처까지도 품고 다독인다.

후세들을 위해 수백만 그루의 편백나무를 심었던 춘원 임종국(1915~1987) 선생의 희생은 가없고 숭고하다. 그러므로 이곳을 찾는 이들은 ‘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품에 안긴다’고 말한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마침내 거대한 숲을 이루는, 개별적 존재가 완결된 개체로 전이되는 기적을 보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느새 눈꽃은 스스로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차가운 꽃바람에 이내 눈앞이 흐려진다. 아름다운 소멸. 부서지듯 바람에 실려 간 저 꽃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꽃으로 피어났다가, 어느 겨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눈꽃과도 같은 존재인지 모른다.

산의 품속으로 들어갈수록 피톤치드의 향이 코끝을 스친다. 시린 잔향이 물큰하게 배어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 세상의 때를 털어낸다. 나도 모르게 짊어지고 왔던 세상의 욕심과 번다한 생각들을 미련없이 내려놓는다. 그리고 속삭이듯 저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열어둔다.

“기쁠 때, 그대 가슴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슬픔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그대에게 기쁨을 주고 있음을. 슬플 때도 가슴속을 다시 들여다봐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그대가 지금 울고 있음을.”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칼릴 지브란의 대표작 ‘예언자’에 나오는 구절이다. 우리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눈앞의 일희일비가 아닌 ‘숲’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무술년(戊戌年)이 밝았다. 눈꽃 사이로 부서지는 겨울볕이 따사롭다. 올해는 전라도 정명 1000년이 되는 해다. 천년의 시간이 가뭇없이 지나고, 또 다른 천년의 시간이 당도해 있다. 무수히 많은 시간의 명멸과 무수히 많은 이들의 역사가 모여 오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천년 전의 역사와 지금의 역사가 별반 다르지 않고, 이전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며 범속한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학자 이덕무는 가난한 서얼 출신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학문을 갈고 닦아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그의 문집 ‘선귤당농소’에 수록된 글 가운데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용은 여의주를 자랑하지 않고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도 않는다”는 대목이 있다. 평생 가난한 비주류로 살았던 그도 ‘용’과 ‘말똥구리’로 대변되는 이분법적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올해는 저마다의 가치를 인정하는,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는 한해가 됐으면 싶다.

산 아래는 어느새 눈이 그쳤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르르 눈꽃은 휘날리고 겨울볕에는 온기가 스며있다. 적막하고 하얀 산에서 내려오자 다시 사람 사는 세상이 펼쳐진다. 봄이 오면 지천으로 꽃이 피어날 것이다. 당신들의 삶에도 환한 꽃이 만발하기를 기원한다.

/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