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문병란 시인] 화염병 대신 詩를 던진 저항시인
화순 출신 … 1963년 등단
독재시대 통일·민주화 헌신
부조리에 맞선 ‘무등산의 연인’
2015년 09월 30일(수) 00:00
지난 25일 타계한 문병란 시인은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작품활동을 펼쳤던 남도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생전의 고인 모습. 〈광주일보 자료〉
남과 북의 분단을 견우와 직녀에 비유했던 ‘직녀에게’는 문병란 시인의 대표작이다. 이 시는 1987년 가수 김원중 씨가 노래 ‘직녀에게’를 만들어 부르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여전히 남북이 대치국면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시인의 시는 분단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통일을 향한 간절한 희원으로 다가온다.

지난 25일 타계한 문병란(1934∼2015) 시인은 시와 삶이 일치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남도가 배출한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평생 ‘광주의 어머니’ 무등산을 우러르며 문학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 “거리의 교사”라고 부를 만큼 그의 삶과 문학에 경의를 표했다.

고인은 1934년 화순에서 한학을 하는 부친 밑에서 태어났다.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에게서 선비의 기질과 지사적 풍모가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1963년 다형 김현승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가로수’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시인은 줄곧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작품을 써왔다.

초기의 시는 개인적인 서정을 노래한 시와 역사, 현실에 토대를 둔 작품이 주를 이룬다. 1970년 첫 시집 ‘문병란 시집’을 펴내며 시인은 서문에서 “시는 시인에겐 하나의 신앙과 같은 것”이라는 말로 시에 대한 관점을 드러냈다. 즉 시인은 시를 매개로 부조리현실과 부당한 횡포를 견딜 수 있다고 보았고, 시 창작은 산고의 고통에 비유될 만큼 가치 있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80년대를 전후해서는 저항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시들을 발표한다. 특히 그는 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고초를 당했고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족, 민중, 통일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시집들이 판매금지처분을 받기도 했다. ‘벼들의 속삭임’, ‘5월의 연가’ 등 시집에 드리워진 비판의식은 자연스럽게 민족, 민중문학 창작에 매진하는 계기가 된다.

시인은 교육자로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펼쳤다. 순천고, 광주제일고 교사를 거쳐 1988년 조선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후진을 양성했다.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 광주전남 공동대표를 맡아 지역 작가회의 태동에 산파 역할을 담당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와 5·18기념재단 이사를 역임했다.

민주화활동과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는 동안에도 그의 시는 늘 현실에 입각한 저항정신과 시적 성취를 향한 심미적인 특질에 닿아 있었다. 시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남도의 정서일 만큼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었다.

2000년 전후로는 생활 속의 감정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시들을 발표했으며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는 작품도 선보였다.

김준태 시인은 “문병란 선생은 전라도가 낳은 향토시인이며 민중시인이며 민족시인이며 무등산의 연인”이라며 “참되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많은 이들의 증인”이었다고 했다.

고인은 조선대학교에서 퇴임한 이후 서은문화연구소를 개원하는 등 문학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광주문학관 개관 문제와 용아기념사업 등 지역문학의 현안에도 문단의 어른으로서 힘을 쏟았다.

시집으로 ‘죽순밭에서’, ‘벼들의 속삭임’, ‘땅의 연가’, ‘새벽의 서(書)’ 와 산문집 ‘저 미치게 푸른 하늘’을 비롯해 문학이론서 ‘현장문학론’, ‘민족문학 강좌’ 등 30여 권을 출간했다.

한편 고인은 요산문학상·전남문학상·광주예술상·박인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박성천기자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