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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성적소수자
안경환의 '법과 문화'
2014년 12월 12일(금) 00:00
엊그제 12월 10일은 인권의 날이었다. 1948년 바로 이날 유엔 총회의 결의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 공표되었다. 제정 당시 모든 나라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반대한 나라도, 표결에 기권한 나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규범력이 강해졌다. 유엔의 수장을 배출한 대한민국도 뒤늦게나마 이 날의 의미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와서 인권의 날을 홀대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한때는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던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난 수년간 국제 인권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추락한 나라의 위상을 반영하는 듯하여 씁쓸하다.

올해 세계인권의 날은 초라하기를 넘어 비참하기까지 하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그렇다고 치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밭, 지방자치단체의 모습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모습 또한 어둡다. 당초 서울시는 이날을 기해 시민인권헌장을 선포할 계획이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박원순 시장의 선거공약 중 하나였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시민 스스로가 만든 인권헌장을 제정하겠다는 야심찬 의도였다.

공개 응모와 추첨을 거쳐 자치구 및 연령대별로 150명의 시민위원이 선발되었다. 시민사회와 학계의 인권전문가 30명도 함께 위촉되었다. 수십 차례의 분과회의와 권역별 모임이 열렸다. 시종일관 치열한 토론의 장이 벌어졌다. 후반에 들어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소수 훼방꾼들의 조직적인 행위가 따랐다. 11월 28일, 마지막으로 열린 전원회의가 표결 끝에 헌장을 채택했다. 서울시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합의’가 아닌 ‘표결’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의 핵심은 ‘성적지향’에 기한 차별, 즉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서울시의 태도에 시민사회가 분노하고 성소수자가 시청을 점거했다. 동성애 혐오 세력도 맞서 점거시위를 하고 있다. 인권의 날, 시민위원들이 독자적으로 헌장 ‘낭독식’을 강행했다. 국제사회에 비친, 국제도시 서울의 민얼굴이다.

인권의 기수, 박원순 시장이 ‘인권’보다 ‘정치’를 선택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공개 사과를 했지만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나름 고심했겠지만 바른 선택을 했는지 의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광주는 다르다. 2012년 5월 시행된 광주인권헌장 12조에는 “모든 시민은 피부색, 종교, 언어, 출신 지역, 국적, 성적지향 등에 관계없이 자신의 문화를 향유하고, 자신의 종교를 표명하고 실천하며,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광주학생인권조례도 마찬가지다. 인권과 평화의 도시, 광주의 자랑스러운 모습이다. 최근에 충청남도도 광주의 선례를 따랐다.

성소수자의 차별 금지는 한 사회의 인권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 지 오래다. 서양의 역사는 오래토록 동성애에 대한 탄압과 차별로 얼룩졌다. 한때는 동성애를 범죄로 처벌했다. 히틀러 나치정권은 장애인과 동성애자를 집단 학살했다. 유태인과 같이 ‘청산해야 할’ 사회악으로 규정한 것이다.

2차 대전 후, 시대가 발전한(?) 증거로 범죄자 대신 정신병자라는 새로운 딱지가 붙었다. 미국은 유럽의 ‘사이코패스’, 즉 동성애자의 이민을 막는 법을 제정했다. 이 모든 편견의 세월이 지나갔다. 이제 동성애는 사생활의 정체성, 즉 ‘라이프 스타일’일 뿐이다. 설령 다수의 눈에는 불편해보일지라도 차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곧바로 인격적 정체성이다. 소수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는 모든 종교와 보편적 인권의 기본적 가치다. 젊은이들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라. 거의 모든 대학에 성소수자 동아리가 공공연하게 활동한다. 학생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유엔인권이사회는 2011년 채택한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결의안’에서 성소수자 차별을 중대한 국제인권 사안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도 이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2001년 시행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같은 취지의 내용이 행형법과 군 관련법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사회에는 이미 이 논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시대를 거스르려는 우려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낡고 편협한 도그마의 포로가 되어 ‘사랑과 자비의 종교’를 무색케 하는 한심스런 작태다.

광주에서도 자랑스러운 인권헌장과 인권조례를 개악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된다고 한다. 설마 그럴 리야 없지만 진지하게 경청할 일이 아니다. 광주는 인권과 평화의 도시다. 설령 서울의 상공이 반인권 기류로 일시 혼탁해져도, 이름 그대로 사람 사이에 높낮이를 거부하는 무등산(無等山) 정기마저 오염시킬 수야 없다.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가인권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