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만에 재회한 두 남녀는 카페에서 시시콜콜한 일상을 늘어 놓는다. 수다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남자 주인공 제시는 파리지앵인 셀린느에게 파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을 안내해달라고 말한다. 셀린느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파리 12지구에 자리한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e)공원으로 제시를 이끈다. 두 사람은 호젓한 산책길을 거닐면서 카페에서 나누지 못했던 자신들의 일상을 미주알 고주알 속삭인다.
지난 2004년 파리를 배경으로 에단 호크(제시 분)와 줄리 델피(셀린느 분)가 주연을 맡은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의 한 장면이다. 비록 영화의 짧은 무대였지만 개인적으로 주인공의 러브스토리 못지 않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대목이다.
도시 전체가 말 그대로 랜드마크인 파리에서, 그것도 특별할 것 없는 이 공원에 ‘꽂힌’ 이유는 세계 최초의 공중(空中)정원이기 때문이다. 이름 그대로 ‘나무로 조성된 산책로’인 이 곳은 지난 1994년 파리 12지구의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과 벵센(Vincennes)을 잇기 위해 지상에서 10m 높이에 건립된 4.7m 길이의 고가철도를 시민들의 쉼터로 탈바꿈 된 곳이다.
‘비포 선셋’이 상영된 지 10년이 흐른 지난 여름, 기자 역시 남녀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프롬나드 플랑테로 향했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동쪽 끝의 나선계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초입은 영화에서 본 운치있는 분위기와는 달라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계단의 출입구를 빠져 나오자 마자 그림 같은 ‘시크릿 가든’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반전’의 시작이었다.
한 여름의 햇살이 내리쬐는 산책로 옆에는 각양각색의 꽃들과 울창한 나무, 아름다운 조각작품들이 어우러져 이방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발걸음을 몇발짝 옮기자 시원한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청년, 벤치에 앉아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연인, 백발이 성성한 노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담한 연못을 지나자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음악가들과 딸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는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하고 평화로운 파리지앵의 일상들이 마치 한편의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듯 정겹게 느껴졌다. 수많은 관광객들로 번잡한 파리의 명소들에선 결코 느낄 수 없는 파리의 ‘속살’이다. 그래서일까.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라기 보다는 편안한 차림으로 피크닉을 즐기는 파리시민들이 대부분이다.
프롬나드 플랑테는 방치된 폐선부지를 도심의 산책로이자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의 아틀리에와 상업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선구적 사례다. 철도는 한 나라의 경제수준과 번영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오랜 세월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을 잇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도심을 가로 지르는 일부 철로 구간은 엄청난 소음과 공해를 유발하는 부작용을 야기하면서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지난 1859년 바스티유 역과 벵센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세워진 프롬나드 플랑테의 처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건립 후 약 10년 동안은 두 지역을 효율적으로 이어주는 수단으로 제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1869년 이후 이 지역에 지하철 건설이 추진되면서 고가철도의 기능이 약화되자 파리시는 1969년 철도운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전체 면적이 4000여 평에 이르고 길이가 4.7km나 되는 폐선부지는 뾰족한 활용방안을 찾지 못해 1980년대 중반까지 방치됐다. 지상에서 10m 높이 위에 설치된 철길과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64개의 아치형 구조물을 철거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건축가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폐선부지와 기존 구조물을 재활용하자는 방안이 제기됐지만 고가철도를 리모델링한 사례가 없었던 만큼 아이디어를 찾는 데만 무려 10여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은 사이에 폐선부지 일대는 차츰 예전의 활력을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고 작은 범죄의 온상이 되면서 슬럼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갇혀 있던’ 프롬나드 플랑테가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게 된 계기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프로제’(Grands Project·큰 계획)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1년 취임 직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문화예술시설 확충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오늘날 관광명소가 된 오르세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국립도서관, 라빌레트 공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가운데 1984년 방치된 바스티유 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근의 프롬나드 플랑테도 ‘햇빛’을 보게 된 것. 조경건축가 자크 베겔리(Jacques Vergely)와 필리페 마티오(Philippe Mathieux)는 신 개념의 공중정원 및 산책로로 재생시키는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두 건축가는 폐선 부지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시민들이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는 휴식공간을 조성하는 데 무게를 뒀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의 지형적, 구조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독특한 동선연출은 다른 공원에서 느끼기 힘든 프롬나드 플랑테의 매력이 됐다. 특히 10m 높이의 지상에서 산책을 하며 파리 12지구를 바라 보는 전망권은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당시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공원으로 재생시킨 사례는 프롬나드 플랑테가 처음으로 이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명’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았던 폐선부지를 공공성과 상업성을 갖춘 파리의 오아시스로 변신시킨 프롬나드 플랑테는 2009년 비슷한 컨셉의 뉴욕 하이라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프롬나드 플랑테가 파리 시민들의 문화 쉼터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예술의 다리’로 불리는 ‘르 비아딕 데자르’(Le Viaduc des Arts)를 빼놓을 수 없다. 폐선부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1km에 이르는 고가 아래의 64개의 붉은 벽돌 아치들을 공모를 거쳐 당선된 건축가 패트릭 베르제(Patrick Berger)가 산뜻하게 단장시킨 것이다. 베르제는 벽돌아치가 풍기는 고풍스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원형을 유지하면서 유리 재질의 투명성을 부각시킨 디자인으로 54개의 개별 공간을 설계했다. 철도의 구조적 안전을 위해서 설치된 아치들은 지난 2000년 악기, 보석, 가구, 와인, 공예 등 예술가들의 공방과 갤러리, 아트숍, 레스토랑, 카페 등 문화와 쇼핑공간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프롬나드 플랑테와 ‘르 비아딕 데자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불과 10여 년 만에 파리의 변두리인 12지구를 문화1번지로 부활시키는 구심체가 됐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파리 시민들이 호젓한 산책로를 거닐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느림의 미학을 즐기게 됐다는 것이다. 프롬나드 플랑테의 성공은 단순히 폐선부지의 물리적 재생이 아닌 파리 시민들의 일상에 여유를 되돌려 주었다는 점에서 도시재생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jhpark@kwangju.co.kr
지난 2004년 파리를 배경으로 에단 호크(제시 분)와 줄리 델피(셀린느 분)가 주연을 맡은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의 한 장면이다. 비록 영화의 짧은 무대였지만 개인적으로 주인공의 러브스토리 못지 않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대목이다.
‘비포 선셋’이 상영된 지 10년이 흐른 지난 여름, 기자 역시 남녀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들뜬 마음으로 프롬나드 플랑테로 향했다.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동쪽 끝의 나선계단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의 초입은 영화에서 본 운치있는 분위기와는 달라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계단의 출입구를 빠져 나오자 마자 그림 같은 ‘시크릿 가든’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반전’의 시작이었다.
프롬나드 플랑테는 방치된 폐선부지를 도심의 산책로이자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의 아틀리에와 상업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선구적 사례다. 철도는 한 나라의 경제수준과 번영을 이끄는 원동력으로 오랜 세월 도시와 도시, 지역과 지역을 잇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하지만 도심을 가로 지르는 일부 철로 구간은 엄청난 소음과 공해를 유발하는 부작용을 야기하면서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됐다.
지난 1859년 바스티유 역과 벵센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세워진 프롬나드 플랑테의 처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건립 후 약 10년 동안은 두 지역을 효율적으로 이어주는 수단으로 제몫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1869년 이후 이 지역에 지하철 건설이 추진되면서 고가철도의 기능이 약화되자 파리시는 1969년 철도운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전체 면적이 4000여 평에 이르고 길이가 4.7km나 되는 폐선부지는 뾰족한 활용방안을 찾지 못해 1980년대 중반까지 방치됐다. 지상에서 10m 높이 위에 설치된 철길과 이를 지탱하기 위해 세운 64개의 아치형 구조물을 철거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건축가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폐선부지와 기존 구조물을 재활용하자는 방안이 제기됐지만 고가철도를 리모델링한 사례가 없었던 만큼 아이디어를 찾는 데만 무려 10여 년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은 사이에 폐선부지 일대는 차츰 예전의 활력을 잃었을 뿐 만 아니라 크고 작은 범죄의 온상이 되면서 슬럼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길고 어두운 터널에서 ‘갇혀 있던’ 프롬나드 플랑테가 밝은 햇살 속으로 나오게 된 계기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프로제’(Grands Project·큰 계획)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1년 취임 직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문화예술시설 확충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오늘날 관광명소가 된 오르세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루브르 박물관 피라미드, 국립도서관, 라빌레트 공원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가운데 1984년 방치된 바스티유 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을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인근의 프롬나드 플랑테도 ‘햇빛’을 보게 된 것. 조경건축가 자크 베겔리(Jacques Vergely)와 필리페 마티오(Philippe Mathieux)는 신 개념의 공중정원 및 산책로로 재생시키는 마스터 플랜을 세웠다.
두 건축가는 폐선 부지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시민들이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는 휴식공간을 조성하는 데 무게를 뒀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의 지형적, 구조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독특한 동선연출은 다른 공원에서 느끼기 힘든 프롬나드 플랑테의 매력이 됐다. 특히 10m 높이의 지상에서 산책을 하며 파리 12지구를 바라 보는 전망권은 특별한 경험이기도 하다.
당시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도를 공원으로 재생시킨 사례는 프롬나드 플랑테가 처음으로 이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혁명’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았던 폐선부지를 공공성과 상업성을 갖춘 파리의 오아시스로 변신시킨 프롬나드 플랑테는 2009년 비슷한 컨셉의 뉴욕 하이라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프롬나드 플랑테가 파리 시민들의 문화 쉼터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예술의 다리’로 불리는 ‘르 비아딕 데자르’(Le Viaduc des Arts)를 빼놓을 수 없다. 폐선부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1km에 이르는 고가 아래의 64개의 붉은 벽돌 아치들을 공모를 거쳐 당선된 건축가 패트릭 베르제(Patrick Berger)가 산뜻하게 단장시킨 것이다. 베르제는 벽돌아치가 풍기는 고풍스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원형을 유지하면서 유리 재질의 투명성을 부각시킨 디자인으로 54개의 개별 공간을 설계했다. 철도의 구조적 안전을 위해서 설치된 아치들은 지난 2000년 악기, 보석, 가구, 와인, 공예 등 예술가들의 공방과 갤러리, 아트숍, 레스토랑, 카페 등 문화와 쇼핑공간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프롬나드 플랑테와 ‘르 비아딕 데자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지 불과 10여 년 만에 파리의 변두리인 12지구를 문화1번지로 부활시키는 구심체가 됐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파리 시민들이 호젓한 산책로를 거닐며 예전에 알지 못했던 느림의 미학을 즐기게 됐다는 것이다. 프롬나드 플랑테의 성공은 단순히 폐선부지의 물리적 재생이 아닌 파리 시민들의 일상에 여유를 되돌려 주었다는 점에서 도시재생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다.
jhpark@kwangju.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