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무언가를 꿀꺽 삼키고, 아이에게 말했다.
“안내 방송을 믿지 마라!”
어쨌거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난 내 몸은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머리를 배반하고 온순하게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는데 익숙하다. 위험을 감지하고 행동하는 본능까지도 훈육되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란 기실 순응과 타협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배가 기울고 이상스런 기운을 감지했더라도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면 얌전히 지시에 따랐을 것이다. 그들이 전문가니까, 그들의 권위를 믿으니까, 믿어야만 하니까. 물이 차오르고 몸이 잠겨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슬프고 아픈 소식들 속에서 살아도 지옥 같이 괴로운 나날이었다. 실로 ‘세월호’ 사고는 너무 많은 것들을 일시에 드러냈다. 시신이 인양되지 않은 며칠 동안 언론에 대한 불신, 인터넷을 통해 양산되는 괴담, 정권에 대한 불만이 마구잡이로 폭발했다. 세상의 모든 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더욱 쓰라렸다. 이 미친 세상의 희생양은 오직 죄 없는 아이들과 선량한 사람들이기에.
“폐쇄사회가 당하는 가장 큰 곤경, 그것은 모든 사태가 항상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라는, 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1986년에 쓴 글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생한 현재형으로 읽힌다.
사고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한국 사회를 더욱 ‘패닉’으로 몰고 간 것은 고스란히 폐쇄사회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낸 사건의 경과와 처리 방식이었다.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라는 암초에 부딪혀 우왕좌왕 갈팡질팡했다. 끊임없는 유언비어와 오보와 괴담이 싹틀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책임자도, 체계도, 시스템도, 매뉴얼도 없이 오직 남은 것은 피해자와 상심한 가족들뿐이었던 것이다.
해양 요원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인 한국해양대학교의 교훈 중 하나는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埋骨)”이라고 한다. 매골이란 본디 땅에 뼈를 묻는다는 의미이지만, 이들은 모든 사람이 무사히 탈출할 동안 계속 SOS를 보내며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하다가 바다에 뼈를 묻겠다는 것이다. 해상에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마도로스들에게는 그것이 양심을 넘어선 직업윤리이자 궁극의 책무인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의 선장은 도망갔다. 배를 버리고, 배 속에 살아있던 수많은 목숨을 외면하고 달아났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목숨이었다. 오판이거나 거짓인 선실 대기 안내 방송만 내보내지 않았다면.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웬일인지 낯설지 않다. 기막힌 기시감이 든다.
가까이로는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때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고 대피하는 바람에 승객들이 고스란히 갇힌 채 사망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서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가 4000여 명의 피난민들 눈앞에서 폭파되었던 사건이 상기된다. 당시의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철교였다. 다리가 끊기던 하루 전날인 27일 새벽,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육성 방송을 틀어놓은 채,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은 남행 열차를 탔다.
아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 국경지대인 의주마저 불안해 명나라 망명까지 모색했던 선조도 이 책임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책임자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결국 왕성인 경복궁은 일본군이 아니라 버림받은 백성들의 분노에 의해 불탔다.
아이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만화책 중에 ‘살아남기’ 시리즈가 있었다. 남극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정글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하지만 이제는 ‘한국에서 살아남기’가 절실한 지경이다. 남극과 사막과 정글과 빙하에서 위급 상황에 처할 일이 한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곤궁에 빠질 경우만큼 많기야 하겠는가?
분김에 안내 방송을 믿지 말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안내 방송을 무시하고 혼자 알아서 탈출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재난 상황에서는 안내 방송에 따라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이 기본 수칙이다. 개별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또 다른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이거나 오판이거나 무책임한 안내 방송이 양치기 소년처럼 거듭되다 보면 아무도 그것을 믿고 따를 수 없게 된다. 재해와 위난을 오직 개인의 판단과 본능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세상이 아니다.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다.
<소설가>
“안내 방송을 믿지 마라!”
어쨌거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난 내 몸은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머리를 배반하고 온순하게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는데 익숙하다. 위험을 감지하고 행동하는 본능까지도 훈육되기 마련이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란 기실 순응과 타협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배가 기울고 이상스런 기운을 감지했더라도 선실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들으면 얌전히 지시에 따랐을 것이다. 그들이 전문가니까, 그들의 권위를 믿으니까, 믿어야만 하니까. 물이 차오르고 몸이 잠겨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폐쇄사회가 당하는 가장 큰 곤경, 그것은 모든 사태가 항상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라는, 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1986년에 쓴 글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생한 현재형으로 읽힌다.
해양 요원을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인 한국해양대학교의 교훈 중 하나는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埋骨)”이라고 한다. 매골이란 본디 땅에 뼈를 묻는다는 의미이지만, 이들은 모든 사람이 무사히 탈출할 동안 계속 SOS를 보내며 배와 함께 운명을 다하다가 바다에 뼈를 묻겠다는 것이다. 해상에서 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하는 마도로스들에게는 그것이 양심을 넘어선 직업윤리이자 궁극의 책무인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의 선장은 도망갔다. 배를 버리고, 배 속에 살아있던 수많은 목숨을 외면하고 달아났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목숨이었다. 오판이거나 거짓인 선실 대기 안내 방송만 내보내지 않았다면.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웬일인지 낯설지 않다. 기막힌 기시감이 든다.
가까이로는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때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고 대피하는 바람에 승객들이 고스란히 갇힌 채 사망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서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가 4000여 명의 피난민들 눈앞에서 폭파되었던 사건이 상기된다. 당시의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철교였다. 다리가 끊기던 하루 전날인 27일 새벽,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敗走)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라는 육성 방송을 틀어놓은 채,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은 남행 열차를 탔다.
아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떠나, 국경지대인 의주마저 불안해 명나라 망명까지 모색했던 선조도 이 책임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책임자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겠다. 결국 왕성인 경복궁은 일본군이 아니라 버림받은 백성들의 분노에 의해 불탔다.
아이가 어렸을 때 즐겨 보던 만화책 중에 ‘살아남기’ 시리즈가 있었다. 남극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정글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하지만 이제는 ‘한국에서 살아남기’가 절실한 지경이다. 남극과 사막과 정글과 빙하에서 위급 상황에 처할 일이 한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곤궁에 빠질 경우만큼 많기야 하겠는가?
분김에 안내 방송을 믿지 말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안내 방송을 무시하고 혼자 알아서 탈출하라고 가르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재난 상황에서는 안내 방송에 따라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이 기본 수칙이다. 개별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또 다른 안전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이거나 오판이거나 무책임한 안내 방송이 양치기 소년처럼 거듭되다 보면 아무도 그것을 믿고 따를 수 없게 된다. 재해와 위난을 오직 개인의 판단과 본능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세상이 아니다.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