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 없는 공연…공감으로 치유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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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본 없는 공연…공감으로 치유 받다
한국심리드라마연구원 ‘공감’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서 공연
배우·대본 즉석에서 결정
관객이 배우로 나서 고민 공유
2023년 10월 30일(월) 19:45
일일 배우로 무대에 오른 A씨를 위로하기 위해 관객들이 핸드폰 불빛을 켜는 장면. <한국심리드라마연구원 제공>
공연 포스터와 리플렛이 ‘이상’했다. 연극인데 주연배우도 대본도, 짜여진 각본도 없었다. 본 공연이 시작되자 주인공을 객석에서 즉석 선발한다는 말에, 처음에는 모두 주저하며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용기를 낸 세 명의 관객들이 배우 역할에 지원했다. 이들은 각각 소설가로서의 고민, 삶의 방향성, 사업 실패담을 간략한 시놉시스처럼 풀어냈는데, 다른 두 사람의 양보로 A씨가 이날 공연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됐다.

A씨는 무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중년 남성으로 광주에서 거주하는 평범한 가장이다. 두 딸, 아내와 동반한 그는 수년 전 주식 투자로 수억 원 손실을 입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적이 있다. 이후 반복되는 가족의 갈등으로 전문 기관에서 심리치료까지 받았지만 이렇다 할 효과는 없었다.

“그동안 여유가 없어 가족들과 공연장을 찾은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싶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어요. 저도 모르게 발이 저절로 연단으로 향했습니다.”

지난 28일 오후 광주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한국심리드라마연구원이 선보인 치유심리드라마 ‘공감’은 인간 내면심리를 예술공연 형식으로 만든 즉흥극이다. 1920년대 비엔나에서 심리극의 기원으로 꼽히는 ‘자발성 극장’이라는 연극을 창시한 모레노의 즉흥심리극을 떠올리게 했다. 연기자들이 맡고 있는 배역을 완전히 배제한 체 대본을 없앤다면, 관객과 배우 모두에게 새로운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공연 형태다.

연출과 진행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우상이 맡았다. 현재 밝은마음병원장이자 사이코드라마 수련감독 전문가로, 한국사이코드라마 소시오드라마학회장을 역임했다.

즉흥극의 시작은 예사롭지 않았다. 객석 맨 앞줄에 8명의 보조 연기자들이 앉아 있었는데 A씨가 아내, 딸, 자기 자신을 대신하는 배우들을 선발했다. A씨가 ‘주식으로 수억 원을 날린 것 같은 배우’를 손가락으로 지명할 때는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글세 방에 살면서, 1997년 IMF때는 혼수 금가락지까지 팔아가며 마련한 종잣돈인데…… .그걸 한 순간에 날려버렸어요”

A씨는 빈 의자에 앉아 주식이 폭락하는 모니터 앞에서 하릴없이 앉아 있던 수년 전 그날을 재연했다. 절망스럽던 순간을 이해해주던 아내, 그동안 데면데면 지내온 딸들의 역할은 보조연기자들이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같은 장면은 심리치료에서 활용되는 ‘집단심리치료’나 ‘연극심리치료’ 등 의학적 기법과도 맞물려 있었다.

공연이 절정으로 치닫자 A씨의 분신(보조연기자가)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는 아무것도 덮지 않고 바닥에 쓰러진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울분을 토하다가, 함께 누워 보조연기자를 안아줬다. 수년 간 가족을 위해 희생해온 스스로를 위무하고 처음으로 용서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청춘/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인생”이를 응원하듯 객석에서는 ‘아빠의 청춘’이 울려 퍼졌다. 사전 협의된 바 없지만, 약속한 것처럼 모두가 함께 부르면서 ‘일일 배우’의 용기를 응원했다. 무대 위 A씨는 엉엉 울며 객석에 앉아있는 가족들 쪽을 연신 바라봤다.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A씨와 보조출연자들이 함께 ‘행복한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

“저랑 와이프는 양옆에 서고 우리 두 딸이 가운데에 있으면 좋겠어요. 모두 손은 ‘꼭’ 맞잡아주세요”

그의 디렉팅에 따라 네 명의 보조출연자들은 손을 맞잡고 포즈를 취했다. 무대 위에서 행복한 이들의 모습을 보며 A씨와 관객들은 함께 울고 웃엇다.

윤우상 연출가는 “마음 속에 응어리처럼 남아 있던 트라우마나 상처들은 쉽게 없어지지 않고 사는 동안 우리를 괴롭게 한다”며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우리의 고민들이 즉흥적으로 공유될 때, 연대와 공감의 힘으로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연은 따뜻한 봄날 유채꽃밭을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됐다. 관객들이 흔드는 노랗고 흰 천을 배경으로 A씨와 보조출연자들이 무대를 한 바퀴 순회했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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