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것은 미래의 유물로 남는다.’

조각, 설치, 미디어 아트 등 다양한 장르적 실험을 멈추지 않는 이정기 작가(44)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다.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제 19회 하정웅청년작가가 초대전 빛 2019’(8월25일)전에서 만나는 그의 조각상은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날 것’의 모습이 미래에는 역사를 기억하는 ‘유물’로 남겨질 거라는 걸 잘 보여준다.

새 생명을 잉태한 여성, 안전모를 쓴 현장 엔지니어, 다부진 표정의 청년, 바닥에 엎드린 여자아이, 그리고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년의 남자와 여자까지 그의 손에서 빚어진 조각상과 그림들은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광주미술상, 신세계미술제 대상에 이어 올해 하정웅천년작가에 선정된 이 작가는 지난해 광주시립미술관 국제레지던시 첫 입주작가로 선정돼 부지런히 작업을 해왔다.

“현재의 생각과 판단, 우리의 결정이 미래에 어떻게 발현되고, 유물로 남는 지 관심을 가져왔어요. 유물은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고리죠.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미래에 어떻게 남을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급속한 변화와 예측하기 어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삶을 한번쯤 돌아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얼핏 대리석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플라스틱과 유리섬유, FRP 등으로 작업했다. 오래된 유물이 ‘발굴’된 것처럼 보여지도록 거칠게 마감을 하고, 채색으로 대리석 느낌을 표현했다. 진짜가 아닌, ‘페이크’(fake·가짜)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고의 전환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또 텅빈 조각상의 뒷모습을 방치하듯 노출시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의 작품 속 소재는 가족과 동료 등 주변인물들이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 한국전쟁, IMF 등 한국근현대사의 산 증인인 부모, 외국 건설 현장에 나가있는 지인 등이다. 인상적인 작품은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모습을 담은 ‘바다를 건너서’다. 조각 작업에서 실제 크기로 석고를 이용해 본을 뜨는 그는 큰딸을 본 떠 이 작품을 만들었다.

“인류애, 난민 이런 거창한 의미보다도 이 사진을 봤을 때 ‘아빠’로서 너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충격이 컸어요. 이 아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전남대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는 “작가가 경쟁력이 있으려면 주제 의식과 함께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담긴 오브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뒤틀리고 끊어지고 조각난 거울을 소재로 활용해 ‘우리 모습을 직시’하는 ‘깨진 거울 작업’을 진행했다.

‘시대의 유물’ 작업은 2015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거울 작업이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소재가 주는 강렬함에 눌려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좀처럼 관람객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게 아닌가 고민하던 중, 그해 광주 원로·중진 작가들이 수여하는 광주미술상을 수상한 게 계기가 됐다.

“선배님들이 주시는 상이니 무게감, 책임감이 생겼죠. 나의 작품에 대해 나의 예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됐습니다. 감동을 시키는 것,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었고 바닥에 모든 걸 내려놓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의 숨겨놓은 의도를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나의 의도 자체를 ‘아예’ 드러내 놓고 싶다고 생각했죠.”

포장하지 않고, 마음에서 시키는 대로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겠다는 그의 ‘유물’ 작업은 앞으로도 지속될 예정이다. 문의 062-613-5390.

/글·사진=김미은 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