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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100년<13> 1970년대 초 암흑기
충무로 옥죈 유신…검열에 잘려나간 한국영화
영화진흥공사 설립·제작사 허가제·외화수입쿼터제 등
정부 직접 나서 영화산업 통제…1973년 2월 영화법 개정
영화진흥공사, 새마을·계몽·선전 영화 제작
‘증언’ ‘들국화는…’ 등 대중적 파급력 기대했지만 흥행 실패
김기영 감독 ‘화녀’ ‘충녀’ 생존과 원초적 본능 다뤄
하길종 감독 ‘화분’은 독재정권 민낯 표현
2019년 07월 10일(수) 04:50
















1971년 4월 치러진 제7대 대통령선거는 박빙이었다. 3선에 도전하는 박정희와 이에 맞선 김대중이 접전을 펼친 결과였다. 김대중은 장기집권 저지와 정권교체를 내세우며 박정희를 위협했다. 그렇게 김대중을 어렵게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1972년 유신 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도모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유신 헌법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으로서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 구조상에 있어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 강화로 독재를 가능케 한 헌법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영화 역시 1970년대 내내 억압과 검열에 시달려야 했다. ‘공안 또는 풍속을 현저히 문란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을 솎아내고 걸러낸다는 미명 하에 신문기사와 대학 강의는 물론 문학과 음악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검열이 이루어졌고, 영화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영화는 대중에 미치는 파급력이 컸던 이유로 엄격한 검열이 시행되었다. 제작 신고 때부터 시나리오가 심사 대상이 되었고,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검열을 하는 등 영화제작 전반에 검열의 손길을 뻗쳤다. 그러니까 1970년대 초의 한국영화는, TV시대 개막으로 영화 관객이 줄어들고 있었고, 여기에다 정부의 통제 및 검열 강화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영화산업을 통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유신정권은 1973년 2월 영화법을 개정했다. 이른바 ‘유신영화법’인 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진흥공사를 설립하고 제작사 허가제와 외화수입쿼터제를 통해 영화통제를 손쉽게 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허가받은 소수의 영화사들은 거의 독점적인 제작 권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영화산업의 불황 속에서도 경쟁이나 자구 노력 없이도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수영화 및 국책영화를 제작하면 외화 수입 권한을 주었기에 정부방침에 맞는 영화를 양산하기도 했다. 이처럼 허가받은 소수의 제작사들은 체제에 순응하는 조건으로 보호와 통제의 울타리 안에서 독과점적 특혜를 누렸다.

여기에다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1편을 수입할 수 있는 시책도 한국영화 활성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제작사들은 3편의 영화를 제작하게 되면 한 편의 외화수입권을 딸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보다는 졸속으로 싸구려영화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외화를 수입해 벌어들인 돈이 한국영화에 투자되는 것도 뜸했다. 그렇게 제작사는 덩치를 키워갔지만, 한국영화는 침체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이 시기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권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관객들이 한국영화에서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정부는 직접 나서서 유신체제에 적합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이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영화진흥공사는 창설 작품으로 반공영화인 ‘증언’(1973·임권택)과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3)를 제작했다. 이들 영화들은 ‘반공’을 부각시킬 것을 감독들에게 주문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증언’은 북의 남침으로부터 서울수복에 이르는 과정을 주인공 순애(김창숙)의 눈으로 목격하는 영화인데, 관객동원이 신통치 않자 단체관람을 유도해 겨우 체면치레를 했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반공을 선전하기보다는 전쟁의 비참함에 초점을 맞추며 당국의 이해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편집권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유신정부는 ‘아내들의 행진’(1974·임권택)과 같은 새마을영화를 제작하는 등 영화를 선전수단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이렇듯 계몽·선전의 효용과 대중적 파급력을 일거에 획득하려 한 국가적 기획은 감독의 연출관과 국가의 의도가 어긋나면서 차질을 빚었다. 유신시대가 한국영화 감독들의 작가적인 능력을 국책영화나 반공영화로 이용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신통치 못했던 것이다.

이렇듯 1970년대 초 한국영화의 현실은 암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기영 감독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영화를 내놓아 크게 성공했다. ‘화녀’(1971)와 ‘충녀’(1972)로 연속해서 한국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두 편의 영화는 김기영 감독이 반복해서 다뤘던 이야기들의 변주다. 그러니까 처녀가 중산층의 가정에 가정부나 첩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키는 이야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했던 것이다.

‘화녀’는 순박했던 시골 처녀 명자(윤여정)가 가정부로 들어간 집에서 안주인(전계현)이 집을 비운 사이 남편(남궁원)과 불륜을 저지르고, 결국 임신과 낙태 끝에 그 집을 파멸시키는 이야기다. ‘하녀’(1960)를 시대적인 상황만 바꿔 10년 만에 다시 내놓은 이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인간의 생존 문제와 원초적 본능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고, 무의식 속에 감춰진 욕망을 탁월한 심리묘사와 미장센을 통해 펼쳐내며 당대의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충녀’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술집의 여급이 된 명자(윤여정)가 술집 여자들의 계략으로 동식(남궁원)의 첩이 되고, 성불구였던 동식이 명자의 도움으로 남성성을 회복하지만, 본처와 첩 사이의 권력관계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파국을 맞는 이야기다. 이 영화 역시 파격적인 상황설정과 문어체 대사 그리고 기괴한 미장센이 넘쳐나며 김기영 감독 특유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두 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 명자로 출연한 윤여정은 욕망과 광기에 사로잡힌 파워풀한 연기를 선보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시기 영화 중 ‘화분’(하길종·1972)도 독창적인 영화 중 한 편이다. ‘화분’은 하길종 감독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연출한 데뷔작으로, 당시 한국영화와는 차별화된 현대적인 감각의 영화였다. 서울 근교의 ‘푸른 집’에는 애란(최지희)과 미란(윤소라) 자매가 살고 있다. 애란은 현마(남궁원)의 첩으로 현마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현마가 단주(하명중)라는 청년을 집으로 데려오게 되면서 이 집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여기서 ‘푸른 집’은 청와대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하길종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파시즘정권의 허위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까발리며, 창작자들의 입을 틀어막았던 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