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시계’

‘관객과 하나 되는 공연’이란 캐치프레이즈는 꽤나 흔히 보이는 문구지만, 간단한 질문을 건네거나 관객을 무대로 초대하는 것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최근 무대·객석 구분이 없는 좁은 방에서 공연하고, 관객과 배우가 함께 연기하며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하나 되기’를 시도한 공연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극단 얼·아리가 펼치는 공연 ‘어쩌면 스무 개의 이야기’가 지난 17일 오후 7시 30분 광주시 남구 양림동 ‘아리네 게스트하우스’에서 열렸다. ‘관객 역(役)을 공모한다’는 콘셉트로 눈길을 끌었던 이 공연은 참가 신청한 관객 중 선발된 20명만이 참가할 수 있었다. 관객끼리 4명씩 짝지어 게스트하우스 7개 방 곳곳에 준비된 공연을 찾아다니며 진행된 이날 공연은 연극, 무용, 음악 콘서트, 전시 미술 등 다채로운 콘텐츠로 관람객을 맞았다.

1층 로비에서 ‘어쩌면’, ‘이야기’ 등 각 모둠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받고 지하 1층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곧이어 익살스런 연기로 공연장 무대 매너를 설명하는 짧은 연극 ‘그렇습니다’를 선보이며 관객의 자원을 받아 등장인물로 출연시키는 등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환기시켰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자 관객들은 특별한 순서 없이 내키는 대로 공연을 찾아다녔다.5·18과 관련된 콘텐츠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2층 복도 가장 안쪽 방에 준비된 ‘고장난 시계’ 공연과 3층에서 진행되는 ‘감각의 방’. 80년 당시 자식들을 잃은 트라우마를 가진 할머니(고난영 배우)를 주제로 펼치는 ‘고장난 시계’는 관객에게 아들, 딸, 기자, 요양원 직원 등의 역할을 정해 진행되며,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차츰 자신의 배역을 깨닫게 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감각의 방’(정경아 배우)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만으로 진행되는 체험극이다. 5·18 최후의 항쟁 당시 박영순씨의 연설과 난무하는 총성, 헬기 프로펠러 소리를 침대에 누워 가만히 듣다 보니 80년 그 날의 현장에서 집에 누워 잠을 청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4층에선 음악 공연 ‘음악과 독백’이 마련됐다. ‘오롯이 혼자 섬’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무명 가수 임창숙씨는 관객에게도 아픈 과거나 앞으로의 다짐 등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이름을 만들게 해 ‘자신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지영 배우의 ‘나의 이야기’는 입구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야만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이다. 잠금 장치를 풀자 새파란 조명으로 가득 찬 방 안 늘어선 4개의 관이 눈에 들어오며 으스스하고 꺼림칙한 분위기를 풍겼다. 공포 체험관같은 첫인상과 달리, 좁은 관에 누워 무명 천을 덮고 나면, 유 배우의 최면을 거는 듯한 대사와 함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외에도 두 대의 침대에 각자 누워 옥신각신 말싸움이 한창인 남매의 대화로 취업난, 예술계의 좁은 입지 등 청년들의 현실을 짚는 안윤국·노은지 배우의 연극 ‘광주 리어의 자식들’, 가구를 사러 온 손님 입장이 돼 판매원의 언변에 휩쓸리는 ‘중고 침대’도 이어졌다. 옥상에서는 역동적인 무용수의 몸놀림과 그 뒤로 보이는 고요한 밤의 골목이 대조되며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박누리 무용수의 무대가 펼쳐졌다.

모든 순서가 끝나면 1층에 모여 각자 공연에서 느낀 바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마련됐다.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 ‘힘내서 집에 가자’, ‘내 자신이 참 예쁘다’ 등 다채로운 20개의 글귀가 만들어졌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모둠으로 묶여 서먹했던 관객들도 어느새 들떠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쉬운 점은 정해진 동선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 분배가 잘못돼 7개 방을 모두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다른 관객이 공연을 관람 중일 땐 방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 지루해지는 점도 아쉬웠다. 공연장 곳곳에 설치된 고추잠자리 등 미술 작품을 돌아볼 여유도 부족했다. 각 공연의 콘셉트가 개성이 강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신이 산만해지기도 했다.

이날 공연을 찾아온 이나영(36·양림동)씨는 “집 근처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데, 공연장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니 새로웠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공연이 끝나고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기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관람객 배수빈(35·주월동)씨는 “특히 ‘광주 리어의 자식들’ 공연에서 투정부리고, 놀리다가도 서로를 걱정하는 남매의 모습이 크게 공감돼 기억에 남는다. 또 피아노 공연에서 일상에 지친 스스로를 표현하는 기회가 돼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극단 얼·아리는 오는 7월15일부터 9월23일, 10월21일, 11월18일에 다음 공연을 진행할 예정이다.

참가 신청은 웹사이트(https://bit.ly/2Hx7VR5)나 전화를 통해 가능하며, 특별한 사연을 함께 일러두면 추첨을 통해 무료 숙박권을 받을 수 있다.

무료 공연. 문의 010-2659-6998.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