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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의 ‘소설처럼’ ] 다른 세상을 꿈꾸는 디스토피아 -조남주 ‘사하맨션’
2019년 06월 13일(목) 04:50
‘휴거’라는 말이 있다. 옛말로 주공아파트라 할 수 있는 도시주택공사의 아파트 브랜드 ‘휴먼시아’와 실제로 그러한 처지의 사람은 현재에는 많이 없지만 가난에 대한 멸칭인 ‘거지’의 합성어라 한다. 주로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는 말이라고 하니 더욱 충격적이다. 임대 아파트뿐만이 아니다. 가령 빌라나 연립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두고서는 ‘빌거’라고 칭한단다.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의 어린이들은 ‘자이’니 ‘레미안’이니 ‘힐스테이트’니 하는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네이밍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임대 아파트나 빌라와 같은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독하게도 분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린이가 그렇게 자라도록 한 것은 바로 우리 어른이니 끌끌 혀를 찰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어떤 아파트 놀이터는 같은 단지 주민만 사용할 수 있게 폐쇄되었다. 어떤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배달 노동자가 이용할 수 없다. 어떤 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옆에 특수학교가 건립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한다. 그렇다. 아이들이 아파트 평수를 따지며 친구를 사귀고, 임대아파트나 연립주택에 사는 것의 의미를 약삭빠르게 알아차리도록 한 것은 바로 우리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우리 동네의 평범한 주민인 우리인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젠더 불평등을 본격적 논의의 수면으로 끌어올린 작가 조남주가 신작 ‘사하맨션’으로 돌아왔다. 여성 혐오, 경력 단절, 유리천장이 우리의 현실이었듯이 ‘사하맨션’의 모티브 또한 우리의 지극한 현실이다.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도시 국가가 있고 사람들은 이를 타운이라고 부른다. 타운에는 경제력과 전문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다. 바로 타운의 주민이며 이들을 L이라고 부른다. 경제력과 능력은 없지만 타운의 노동력을 감당하며 2년마다 체류권을 갱신하는 사람들을 L2라고 한다. 이마저도 되지 않는, 주민권은커녕 체류권도 없는 사람들을 바로 ‘사하’라 칭한다. 사하맨션은 그들이 무리 지어 살고 있는 공동체적 공간의 이름이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가까운 미래로 보인다. 소설의 설정은 다소 SF적 기질이 있다. 그러나 시대와 공간, 모티브와 플롯이 모두 용해된 소설은 우리의 삶 자체로 무섭도록 육박해 온다. 조남주 작가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지난 작품에 이어 우리 사회에 분명히 요구되지만 누구도 하지 않는 질문을 피하지 않고 ‘사하맨션’에 담는다. 거기에는 난민 문제가 있고,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이 있고, 돌봄의 공동체가 있다. 잿빛 디스토피아에서도 기필코 존재하는 분연한 연대가 있다.

부자는 점점 부가 쌓이고 빈민은 더욱 곤궁하게 된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자본주의의 편향적 팽창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내 자녀가 거지라고 불릴까 봐,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지 못할까 , 이 시스템에서 탈락할까 봐, ‘사하맨션’의 말미에 시스템에서 탈락한 여성 ‘진경’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 틀렸어. (……)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

이 말은 이 시스템 밖의 다른 세상은 없다는 세상에 고하는 사자후처럼 들린다. 이 말은 공동체의 사람들 모두와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환대의 선언처럼 들린다. 우리는 이러한 사자후와 선언의 경험이 있다. 새삼 오월 광주를 말할 것도 없이, 반복되고 지속된 소설과 같은 외침이 그나마 과거와는 다른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정권이 바뀐다고 모든 일이 해결될 수는 없다. 투표로 인한 변화는 우리가 앞으로 맞이해야 할 거대한 변화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지금의 우리보다 넓은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사하맨션’은 적합한 소설이다. 어떤 소설은 그 소설을 읽기 전과 후의 삶을 바꾼다. 우리에게는 조남주의 소설, ‘사하맨션’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