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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영의 한국영화 100년] <9> 1960년대 초반 명작, 세 편의 한국영화
당대 최고 배우 김진규 출연 세 편의 걸작… 1960년대를 열다
2019년 05월 08일(수) 00:00
1960년대 벽두,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와 독재에 맞선 4·19 혁명이 있었다. 4·19 혁명은 전쟁 후 부정부패와 허무주의가 만연했던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렇게 혁명은 한국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영화인들에게 이 시기는 일종의 ‘해방구’였으며,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검열이 부활하기까지 자유롭게 영화를 찍으며 상당수의 문제작을 배출시켰다. 특히, ‘하녀’(1960)와 ‘오발탄’(1961) 그리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는 이때 만들어진 영화들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그러니까 이들 영화들은 당시 만들어진 ‘세계영화’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1960년 11월 개봉한 ‘하녀’는 당시의 관객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선사했다. ‘하녀’는 김기영 감독의 모태와도 같은 작품으로, 그로테스크한 미장센과 표현주의적 조명 그리고 이단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영화다. 김기영은 ‘죽엄의 상자’(1955)로 데뷔한 후, ‘양산도’(1955), ‘봉선화’(1956), ‘여성전선’(1957)등의 영화들을 만들며 자신의 영화적인 색깔이 무엇인지를 모색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의 비참한 현실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영화를 내놓기도 했다. 석탄을 훔쳐 생계를 이어가는 빈민들의 이야기인 ‘초설’(1958)과 가난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불량아들의 이야기인 ‘10대의 반항’(1959)이 바로 그 영화들이다.

김진규 영화배우
1950년대 중후반 모색과 현실반영의 시기를 통과한 후 김기영은 드디어 자신의 영화적인 개성이 응축된 ‘하녀’를 내놓게 된다. 동식(김진규)은 방직공장 음악부의 음악 선생이자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다. 음악부 활동을 하는 여공 경희(엄앵란)는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으러 동식의 집을 드나들고, 새로 지은 이층집의 살림을 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동식은 경희에게 하녀(이은심)를 소개받는다. 그리고 동식은 아내(주증녀)와 아이들이 집을 비운 사이 하녀와 동침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한 중산층 가정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하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하녀는 방직 공장 여공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인물로, 자신의 욕망이 굴절되자 괴물적인 존재가 되어 한 가정을 붕괴시켜 버린다.

당시 한국 영화 속의 여성들이 전근대의 질서와 근대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던 점에 비춰본다면, 김기영이 탄생시킨 하녀는 시대를 멀리 앞서간 캐릭터였다. 이후 김기영은 ‘화녀’(1971)와 ‘충녀’(1972) 그리고 ‘화녀 82’(1982)와 ‘육식동물’(1984)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배경을 달리하며 ‘하녀’의 인물과 이야기, 공간과 미장센을 끈질기게 변주하고 반복했다.

유현목 감독
김기영은 ‘하녀 다시쓰기’를 통해 윤리에 순응하는 여성관을 거부하고 본능을 중시하는 행동적인 여성관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각종 강박증과 엽기적 성향, 성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형상화시키며,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개성을 뽐냈다.

유현목 감독은, 데뷔작인 ‘교차로’(1956)를 내놓은 이후에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 ‘인생차압’(1958), ‘그대와 영원히’(1958), ‘구름은 흘러도’(1959)등의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며 1950년대 중후반을 통과했다.

그리고 1959년 10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범선의 ‘오발탄’을 읽은 유현목은, 이를 영화로 옮겨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참혹한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한 이범선의 소설은 유현목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렇게 촬영은 시작되었고, 1960년 5월에 영화가 개봉된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정권은 이 영화의 상영을 중지시킨다. 철호(김진규)의 노모가 반복하는 대사인 ‘가자! 가자!’가 지칭하는 곳이 북한을 연상시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정권의 강박증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오발탄’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전해졌고, 정부는 마지못해 재 상영을 허가했다.

‘오발탄’은 한국전쟁을 겪은 실향민 가족의 절망적인 상황을 포착하고 있다. 철호와 그의 가족은 아무런 희망도 찾지 못하는 전후 소시민들의 상징이다. 유현목 감독은 가난과 절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철저한 리얼리즘의 영상으로 담아내며 한국 영화사의 걸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신상옥 감독은 주요섭의 단편소설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영화로 옮겨 걸작을 남겼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봉건적 윤리와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망인이 주인공인 영화로 서정성이 넘치는 작품이다. 또한, 주인공들의 내면심리를 탁월하게 구현한 이 작품은 뛰어난 각색을 통해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 것은 물론 원작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원작을 돋보이도록 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신상옥 감독의 다른 작품들인 ‘동심초’(1959), ‘성춘향’(1961), ‘열녀문’(1962), ‘벙어리 삼룡’(1964)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아름답게 그렸고, 인습에 얽매여 고통 받는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도록 했다.

김기역 감독
이렇듯 1960년대 벽두에 탄생한 세 편의 걸작 영화는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고 있다. 김기영의 ‘하녀’가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의 걸작이라면, 유현목의 ‘오발탄’은 리얼리즘의 걸작이다. 그리고 신상옥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인간의 내면풍경을 담아낸 걸작이다. 그렇다고 이들 영화에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당대의 최고 배우 중 한명이었던 김진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김진규는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4)로 데뷔했고, 이후 ‘옥단춘’(1956), ‘사랑’(1957), ‘청춘극장’(1959), ‘동심초’ 등에 출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1960년대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에서부터 향토색 짙은 문예물, 멜로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의 배역을 소화하면서 팬들을 매료시켰다. 또한, 김진규는 주로 성품은 좋으나 사회적인 능력은 없는 우유부단하고 연약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오발탄’이나 ‘잉여인간’(1964), ‘카인의 후예’(1967)등 리얼리즘 계통의 영화들에서 완숙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친구의 아내인 옥희 어머니(최은희)를 사랑하게 되지만 마음 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표현해 낸 내면 연기는 압권이었다.

/조대영<광주독립연화관 프로그래머>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